순응의 기술 – 다르게 말하면서 같아지는 법

by 콩코드

“다양한 의견 환영합니다”의 역설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은 회의 시작 전, 거의 의례처럼 등장한다. 대기업 사내 공지, 정부 정책 토론회, 대학 세미나—형식과 장소를 막론하고 빠지지 않는 문장이다.


문제는 이 말이 정작 진짜 다양성이 필요한 순간에 작동하는 방식이다. 회의 중 누군가 조심스레 “이 방향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공기는 묘하게 얼어붙는다. 그리고 곧, 익숙한 반응이 돌아온다.


“좋은 의견인데, 우리 방향과 맞게 조금 다듬어 보면 어떨까요?”


다름은 즉시 순응 가능한 형태로 재가공된다. 겉으론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는 듯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방향으로 말이 모아지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한 신입 직원이 회의에서 핵심 정책 방향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결국 “조금 다듬어 반영하자”는 말만 돌아오고, 원래 의도는 반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순응의 기술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순응의 기술’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나는 기득권 질서에 복종하겠다”라고 선언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날의 순응은 훨씬 세련되고 은밀하다.


겉으로는 반대하는 듯 말하지만, 핵심 원칙은 건드리지 않는다. 비판을 제기하되 체제를 위협하지 않도록 각을 순화한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결국 기존 틀 안에서만 작동하게 한다.


이 기술은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직의 화합을 유지하며, 무엇보다 ‘안전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보장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의식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 방식을 익히게 된다.


한국 사회가 순응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유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집단의 조화와 질서를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는 문화적 토대를 지켜왔다. 조선 시대의 유교 질서, 산업화 시기의 국가 주도 성장, IMF 이후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튀지 않는 것’은 곧 생존 전략이 됐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이 회의 중 근본적인 방향 수정안을 제시하면, 때로는 ‘패기’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조직 문화를 모르는 철없음’으로 해석된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당 내부 인사가 기조와 배치되는 발언을 하면, ‘다양성’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신 “배신”, “분열”, “품위 손상” 같은 프레임이 작동한다.


이처럼, 다르게 말해도 결국 같아져야 한다는 압박은 개인의 경력, 인간관계, 생존 전략과 맞물려 강력하게 작동한다.


겉다름 속의 동일성 강박

표면적으로는 서로 다른 의견, 성향, 정체성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허용되는 것은 ‘다른 듯 보이는 안전한 차이’뿐이다.


예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정치적 의견은 철저히 배제되지만, 취향이나 식습관의 차이는 웃음 포인트로 소비된다. 직장에서는 복장이 자유로워졌지만, 성과 평가는 여전히 ‘윗선의 기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사회운동 현장에서도 다양한 세대와 집단이 모이지만, 불편한 의제(군사 문제, 종교 비판 등)는 뒤로 밀린다.


이처럼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겉보기에 다른 차이는 곧 ‘틀림’으로 전환된다.


자기검열의 내면화

순응의 기술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외부의 강제적 압박보다 내면의 자기검열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너무 과격하게 들리지 않을까?”

“여기까지 얘기하면 분위기를 망칠까?”

“안전하게 비유만 들어서 말하는 게 낫겠다.”


이처럼 스스로 각을 깎고 표현을 순화하다 보면, 처음 품었던 문제의식은 점점 흐릿해진다. 결국 우리는 다르게 말하려다 결국 같아지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온라인 공간의 순응 메커니즘

인터넷과 SNS는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성향에 맞는 콘텐츠만 노출해, ‘동질성의 울타리’를 강화한다.


댓글 문화도 마찬가지다. ‘좋아요’가 많은 의견이 다수의 목소리로 간주되고, 다른 의견은 ‘비추’나 악성 댓글로 압박받는다.


최근 한 젠더 이슈 사례를 보면, 초기에는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곧 양 진영이 단일한 ‘대표 의견’ 중심으로 결집했다. 중간 지대에서 양쪽의 문제를 모두 지적한 사람들은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중립의 불가능성이며, 다르게 말하려다 결국 어느 한쪽에 흡수되는 현실이다.


순응의 기술이 만드는 사회

순응의 기술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내부는 깊이 닫힌 사회가 된다.


불편한 진실은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미묘하게 누적된다. 창의적인 변화보다는 ‘관리 가능한 변화’만 시도된다.


결국 우리는 다양성의 무늬만 남은 동질성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순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응의 기술을 완전히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지금 ‘안전하게 보이기 위해’ 표현을 순화하고 있는가?

내가 하려는 비판은 핵심 원칙을 건드리는가, 아니면 주변부만 건드리는가?


이 의견이 불편하게 들리더라도, 왜 말해야 하는가?


때로는 의도적으로 ‘각을 유지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르게 말한 것이 진짜 다름으로 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각을 지켜야 한다.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남기

순응의 기술은 개인에게 안정과 안전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다면, 그 안전은 결국 침묵과 자기검열의 대가로 유지되는 것이다.


진정한 다양성을 원한다면, 다르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르게 남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불편함과 갈등을 감수하는 자리에서만 자라며, 사회와 개인 모두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생각해 볼 질문

나는 지금까지 언제 순응의 기술을 사용했는가?

내 말이 단지 ‘안전한 다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내 주변에서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논리나 결론으로 흡수되는 차이는 무엇인가?


심층 공부를 위한 이야기 – ‘순응의 기술’ 더 깊게 보기

1. 개념적 토대

집단사고(Groupthink) – 어빙 재니스(Irving Janis)가 제시한 개념으로, 집단 내 갈등 회피와 합의 욕구가 비판적 사고를 약화시키는 현상. “안전한 다름”이 지속되면 결국 집단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커진다.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 엘리자베스 노엘-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의 이론. 소수가 다수 의견과 다른 생각을 표현하면 사회적 고립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점점 침묵하게 되는 과정.


동질성 편향(Homophily) –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의견과 네트워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새로운 정보나 다른 시각이 쉽게 유입되지 않는다.


2. 국내 사례

대기업 회의 문화 – 형식적으로 의견을 묻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진 경우가 많아 실질적 논의보다는 보고 형식이 중심이 됨.


정치권의 ‘당론’ 강제 – 국회의원 개개인의 신념보다 당론 투표가 우선시 되면서, 다름을 유지하기보다 소속 집단에 흡수되는 구조.


교육 현장의 ‘안전한 토론’ – 토론 주제가 주로 비정치적·비쟁점 사안으로 한정되어, 학생들이 사회적 갈등 주제를 다뤄보는 기회가 제한됨.


3. 해외 비교

일본의 와(和) 문화 – 한국과 마찬가지로 집단 조화를 중시하지만, 내부 비판을 비공식·비공개 채널에서 처리하는 경향이 강함.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 표면상 ‘다양한 의견’이 활발히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진영 간 동일성 압박이 강해 ‘중도’가 설 자리를 잃는 경우가 많음.


4. 더 생각해 볼 질문

나는 ‘집단사고’에 빠진 경험이 있는가? 그때 어떤 이유로 비판을 자제했는가?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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