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의 한계선 ―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닫히는 문

by 콩코드


‘포용’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포용’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정부 정책, 기업 홍보, 학교 교육철학, 종교 담론까지 포용은 시대정신처럼 자리 잡았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차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언어는 민주화의 구호처럼 너무도 당연한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포용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것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느 순간 ‘한계선’에 다다르게 되는가?


‘다름’을 수용하는 조건

겉으로는 모든 다름이 존중받는 듯 보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장애인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되지만, 지하철역에서 엘리베이터 시위는 여전히 ‘시민 불편’으로 비난받는다.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인식은 확산되었지만,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면 “굳이 거리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따라붙는다.


즉, 우리는 다름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허용 가능한 다름’과 ‘불편한 다름’을 구분한다. 다양성은 무제한 보장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다.


사회 질서를 크게 흔들지 않을 때만 다름은 환영된다.

다수의 불편을 자극하지 않을 때만 존중된다.

경제적·정치적 손실을 최소화할 때만 긍정된다.


결국 포용은 조건부다. 우리가 자주 듣는 “다양성을 존중하지만…”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조건의 다른 표현이다.


‘포용의 한계선’이 드러나는 순간

학교 교육 현장

학교는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교실은 ‘조용하고 무난한 학생’에게 유리하다. 질문이 많은 학생은 “산만하다”, 다른 학습 방식을 요구하는 학생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평가를 받는다. ‘창의성’은 강조되지만 관리 가능한 차이만 허용된다.


직장 문화

기업은 다양성을 인재상으로 내세우지만, 회의에서 흐름을 흔드는 발언을 하면 “조직 문화를 모른다”는 낙인이 찍힌다. 성평등 교육과 제도적 장치는 있지만, 일상적 대화 속 편견과 배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회사가 말하는 포용은 결국 ‘성과에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만 작동한다.


사회적 소수자 이슈

난민 문제에서 포용의 경계는 선명하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당시 한국 사회는 ‘인도주의’와 ‘사회 불안’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여론은 곧 “무작정 받아들일 수 없다”로 기울었다. 포용은 국가 안전·경제 이해·다수의 정서와 충돌하는 순간 쉽게 무너진다.


동일성 강박과 자기검열

조건부 포용은 ‘동일성 강박’을 강화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시작한다.


“내가 너무 다르게 보이면 불리하지 않을까?”

“이 발언이 조직 분위기를 해치는 건 아닐까?”

“정체성을 드러내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이 자기검열은 자유로운 표현을 억누른다. 결국 사람들은 ‘다르지만 안전한 수준’만 연기하며 살아간다. 다양성은 겉으로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같은 쪽으로 조금씩 수렴한다. 이는 창의성과 민주성을 약화시키고, 인간관계조차 위축시킨다.


포용이 금기가 되는 순간


포용의 언어는 역설적으로 금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말이 동시에 “너무 다른 건 말하지 말라”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사가 “다양한 의견을 환영한다”고 말해도 기존 기획을 정면으로 비판하면 “협조적이지 않다”는 낙인이 찍힌다. 이때 ‘포용’은 오히려 발언의 경계를 규정하는 금기어가 된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퀴어 퍼레이드나 페미니즘 집회는 표현의 자유로 보장되지만, 그 뒤에는 항상 “사회 불편을 주지 말라”는 조건이 붙는다.


진짜 포용을 위해 필요한 태도

불편을 수용하는 용기

포용은 갈등을 동반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불편과 마찰을 감내하는 일이다. 불편을 회피하는 태도 속에서는 진정한 포용이 자랄 수 없다.


조건 없는 존중

존중은 상대가 무해할 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름이 위험해 보이고 불편할 때 존중이 필요하다.


자기 내부의 경계선 직면

우리는 스스로 포용적이라 믿지만, 마음속에는 “저 정도 다름은 안 된다”는 선이 숨어 있다. 그 선을 직면하고 조금씩 확장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무리

포용은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 숨은 한계선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포용을 가장한 동일성’을 재생산하게 된다.


진짜 포용은 “다르지만 괜찮다”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름이 불편을 주고, 갈등을 낳고, 때로는 기존 질서를 흔들 때조차 “그 다름을 함께 감당하자”는 태도여야 한다.


따라서 포용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함께 끌어안는 정치적 행위다. 그 정치성 위에서만 다양성은 구호가 아니라 삶의 실제가 된다.




심층 공부를 위한 확장 질문

포용의 언어가 실제로 억압의 수단이 된 사례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특히 ‘포용의 한계선’을 경험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차이에 대해서는 쉽게 포용적이지만, 어떤 차이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가?

‘불편을 감수하는 포용’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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