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시적 충돌 ― 표면의 평화 뒤에서 일어나는 긴장들

by 콩코드


평화처럼 보이는 순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다들 조용하잖아. 아무 문제 없는 거지.”

“괜히 갈등 만들지 말자. 지금 분위기가 좋은데.”


조용함은 흔히 평화로 여겨지고, 갈등은 피해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침묵이 곧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이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 불렀다. 총성이 멎었을 뿐, 불씨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교실, 회의실, 가족 모임, 온라인 커뮤니티 어디서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말하지 못한 긴장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발견한다. 갈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숨어 있을 뿐이다.


억눌린 갈등의 두 얼굴

침묵

말을 꺼내는 순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침묵을 택한다. 직장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아도, 학교에서 차별적 발언을 들어도, “괜히 문제 삼지 말자”는 압력이 지배한다. 표면적으로는 평화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장악하고 있다.

은밀한 저항

직접 맞설 수 없으니 뒷담화, 익명 게시판, 온라인 폭로 같은 방식으로 불만이 흘러나온다. 겉으로는 웃으며 협력하지만 속에서는 서운함과 분노가 쌓인다. 억눌린 갈등은 결국 음지에서 자라난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 장면들

학교의 침묵

‘조용한 교실’은 이상적 풍경처럼 여겨지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자기 검열과 주저함이 숨어 있다. 교사의 언행에 불편함을 느껴도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말썽꾸러기’가 된다. 교실은 표면적 평화를 유지하지만, 사실은 목소리가 억눌린 공간이다.

직장 회의의 합의

회의실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회의록에는 “원만한 합의”라는 문장이 남지만, 문 밖에서는 불만과 냉소가 쏟아진다. 표면적 합의는 사실 억압된 갈등의 산물이다.

온라인의 폭발

학교폭력, 직장 내 괴롭힘처럼 억눌린 갈등은 종종 온라인에서 폭발한다. 표면적 평화로 유지되던 집단이 한순간에 폭로와 대립의 장으로 변한다. 이는 갈등이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비가시적 충돌의 위험성

축적된 분노의 폭발

작은 균열을 방치하다 무너지는 건물처럼, 억눌린 갈등은 결국 더 큰 폭발을 부른다.

신뢰 붕괴

겉으로는 협력해도 속으로는 냉소와 불신이 자란다. 이는 공동체의 기반을 갉아먹는다.

문제 해결의 지연

갈등을 숨기면 근본적 해결은 멀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젠더·세대 갈등은 그 전형적인 예다.


왜 우리는 갈등을 억누르는가

유교적 전통 :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갈등은 곧 불손으로 여겨졌다.

경제적 구조 : 불안정 노동은 침묵을 강요한다. 반발은 곧 생존의 위협이다.

정치적 맥락 : 한국 사회에서 ‘조용한 국민’은 이상적 국민상으로 호명되어 왔다. 갈등은 분열로 낙인찍혔다.

이 요인들이 겹치면서 갈등은 드러내기보다 은폐하는 방식으로 흘러왔다.


갈등을 다르게 이해하기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적대가 아닌 갈등(agonism)’으로 설명한다. 갈등은 사라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갈등을 숨기려 할수록 그것은 더 큰 상처와 폭발로 이어진다. 반대로 갈등을 드러내고 안전하게 논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필요한 전환

갈등의 가시화 장치

학생회 권한 강화, 독립적 고충 처리 시스템, 다양한 공론장 등 제도적 통로가 필요하다.

불편함 감내

불평등·차별·불공정 문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과 맞닿아 있다. 불편함을 감내하는 용기가 없다면 변화도 없다.

갈등 교육

갈등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다. 대립을 생산적 토론으로 전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침묵과 폭발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결론: 평화의 다른 이름

표면적 평화는 언제든 무너진다. 겉으로만 조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결국 더 큰 불신과 폭발을 낳는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갈등이 드러나고 조율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하다.


〈비가시적 충돌〉은 한국 사회의 오래된 풍경이다. 학교, 직장, 정치, 가족 어디서든 우리는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 이 긴장을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는다면, 성숙한 사회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의 조용함은 진짜 평화인가, 아니면 말하지 못하는 억압의 결과인가?”


그 질문에서부터 비가시적 충돌을 가시적 대화로 바꾸는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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