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 문학동네)
슬픔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를 찾아온다. 그날의 날씨와 관계없이, 어쩌면 아무런 예고 없이 우리의 마음을 스쳐 지나며 무겁게 자리한다. 누군가는 슬픔을 피해야 할 불청객처럼 여기고, 덮어두거나 억누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형철은 달리 말한다. 슬픔은 피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부의 대상, 곧 삶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눈이라고 말이다.
슬픔 앞에서 우리는 멈춘다. 그 멈춤은 단순한 정지나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사유와 성찰로 향하는 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남의 아픔을 바라보면서도 쉽게 동정이나 연민으로 끝낸다. 신형철이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유의 매개체, 그리고 인간과 세계를 읽는 도구라는 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문학 속 인물의 슬픔, 현실 속 사건의 아픔을 접하게 된다. 그 속에서 묻는다. “나는 이 슬픔 앞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가?” 감정의 표면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하며 의미를 읽는 순간, 슬픔은 단순한 정서적 경험을 넘어 윤리적·지적 경험으로 확장된다.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계산하고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 속에서 질문을 발견하고, 그 질문을 사유로 전환하는 태도와 연습이다.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체감하고,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그 세계와 연결되는지 묻게 된다. 슬픔은 내면의 거울이자,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윤리적 감각의 장치인 것이다.
손택(Sontag, 2003)의 『타인의 고통』을 떠올려 보자. 손택은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윤리를 탐구했다. 우리는 사진 한 장으로 타인의 고통을 훔쳐보지만, 그 시선이 단순한 관람으로 끝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여기서 신형철은 그 시선을 내면화한다.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경험을 내적 사유와 성찰로 전환하며, 우리의 감정과 사고를 깊게 만드는 길을 보여준다.
슬픔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우리가 개인적 상실이나 아픔을 경험할 때, 그 슬픔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재해석된다. 또한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비극 속의 슬픔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집단적 이해와 연민으로 확장될 수 있다. 신형철은 이러한 층위에서 슬픔을 탐구하며, 단순한 감정의 체험을 넘어, 삶과 세계를 읽는 사유적 틀을 제시한다.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관찰과 내적 반추의 연속이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와 세계를 동시에 마주한다. 슬픔을 통해 우리는 질문을 발견한다.
나는 이 고통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 감정은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슬픔을 통해 어떤 성찰과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가?
신형철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감정의 깊이를 성찰의 도구로 바꾸는 방법을 보여준다. 슬픔은 단순한 정서적 경험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의 통로, 그리고 인간 이해의 깊이를 체험하게 하는 통로인 것이다.
문학 속 슬픔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컨대 한 작품에서 인물이 겪는 상실과 고통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지만, 그 감정을 느끼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단순한 감정이입을 넘어, 내면의 윤리적 감각을 일깨운다. 신형철이 말하는 ‘슬픔 공부’는 바로 이 과정이다.
또한, 현실 속 사건과 사회적 아픔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할지 고민하게 된다.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유와 행동으로 이어갈 수 있는 성찰의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슬픔은 이렇게 우리를 내적 성찰과 윤리적 책임으로 인도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일은 결국 자신과 타인, 세계 사이의 윤리적 거리를 조율하는 연습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사유하고 내면화하며, 삶과 행동 속에서 의미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형철의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슬픔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위한 통로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고통과 연민, 그리고 인간 이해의 깊이를 조금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다고.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수전 손택(Sontag, S.), 《타인의 고통》(On Photography, 2003, Vintage) –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윤리를 사유하게 하는 책.
엘리 위젤(Wiesel, E.), 《나이트》(Night, 1956, Wisdom House, 2007) – 증언을 통한 고통의 기록과 기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Alexievich, S.),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У войны не женское лицо, 1983, 문학동네, 2015) – 전쟁 속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를 통해 슬픔과 고통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책.
마사 누스바움(Nussbaum, M.), 《정치적 감정》(Political Emotions, 2013, 민음사, 2017) – 사회적 연민과 개인의 감정을 연결하여 고통 인식을 확장하는 책.
존 론슨(Ronson, J.), 《그래, 넌 공개적으로 망신당했어》(So You’ve Been Publicly Shamed, 2015, 푸른숲, 2016) – 현대 디지털 시대의 고통과 망신을 통해 감정 소비와 윤리를 고민하게 하는 책.
칼 뉴포트(Newport, C.), 《디지털 미니멀리즘》(Digital Minimalism, 2019, 민음사, 2019) – 디지털 시대에 감정과 시선을 통제하며 슬픔과 고통을 사유하는 전략을 제시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