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잔에 담긴 채, 천천히 향을 피우고, 입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집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우리는 와인의 언어를 느끼게 됩니다. 단어가 아닌 감각으로 말하는 언어.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입으로 맛보며, 마음으로 이해하는 그런 언어 말이죠.
와인은 먼저 눈으로 마십니다. 와인 잔에 담긴 액체를 바라보는 순간, 첫인상이 결정됩니다. 빛을 머금은 진홍빛, 가벼운 장밋빛, 혹은 황금빛처럼 반짝이는 액체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의 눈빛과도 같습니다. 어떤 와인은 오래된 가죽 의자처럼 묵직한 색을 띠고, 또 어떤 와인은 새벽안개의 물기를 닮아 투명하고 섬세하죠.
잔을 살짝 기울여 색의 농도를 보고, 가장자리의 빛을 관찰하는 것은 와인의 ‘문장’을 읽는 첫 단계입니다. 그 가장자리에는 시간의 흔적이, 중심에는 포도의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한 모금 마시기 전에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 와인이 자란 땅의 온기, 양조자의 손길, 그리고 숙성된 오크통의 기억까지.
그리고 코로 읽습니다. 향은 와인의 가장 아름답고도 복잡한 언어입니다. 한 번의 들숨으로 여러 겹의 기억과 감정이 밀려옵니다. 딸기와 블랙체리, 말린 장미와 오크 나무, 젖은 흙과 구운 견과류, 그 모든 향은 와인이 거쳐온 시간의 지문이자 감정의 궤적입니다. 어떤 향은 여름날 창밖을 스치던 바람 같고, 또 어떤 향은 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만나는 오랜 사랑의 편지 같기도 합니다.
향은 입체적입니다. 첫 향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이어지는 향은 천천히 자신을 드러냅니다. 잔을 돌릴수록 향이 풀리고, 와인은 말없이 자신을 설명합니다. 이때 우리는 코끝으로 느낍니다. 말이 닿지 않는 기억의 언저리까지.
입은 진실의 감각입니다. 향으로 상상한 모든 것이 입안에서 확인됩니다. 첫 입에는 포도와 산도의 긴장감이, 두 번째 입에는 탄닌의 부드러운 저항감이 느껴지고, 마침내 혀끝을 지나며 여운이 번져갑니다. 어떤 와인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흑백 장면처럼 서늘하게, 또 어떤 와인은 벽난로 앞에 앉은 듯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맛은 물리적이면서도 정서적입니다. 입속을 맴도는 무게감, 혀끝의 떨림, 목을 타고 흐르는 감촉, 그리고 그 끝에 남는 잔향은 때론 생각보다 깊고 오래 지속됩니다. 좋은 와인은 혀를 떠난 뒤에도 이야기를 조용히 이어갑니다. 잔향은 잊고 싶지 않은 편지처럼 마음에 남고,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인사처럼 오래도록 회상됩니다.
와인의 감각은 단순히 개별적인 감정이 아니라, 조화 속에 있습니다. 짙은 향인데도 무겁지 않고, 달콤하지만 물리지 않으며, 강렬하지만 조용한 여운을 남기는 것. 바로 그 균형이 와인을 특별하게 만들며, 우리가 그 느낌을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워 자주 비유와 감성에 의존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와인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와인은 가을 오후 같다.”
“담배 연기와 가죽이 섞인 묘한 그리움이 있다.”
“처음엔 낯설지만, 시간이 흐르자 따뜻하게 안기는 맛이다.”
와인에 대해 정확히 말하는 대신, 우리는 비유와 감성으로 와인의 결을 설명합니다. 그만큼 와인은 감각의 예술이며,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경험입니다. 와인은 시처럼 흐르고, 때로는 음악처럼 울리며, 누군가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스며듭니다.
그래서 와인은 혼자보다 함께 마실 때 풍부해집니다. 누군가와 같은 와인을 마시고도 그가 전혀 다른 향과 느낌을 말할 때, 우리는 서로의 감각을 빌려 와인을 새롭게 배웁니다. 그 차이는 대화가 되고, 대화는 또 다른 와인의 기억을 만듭니다.
“이건 복숭아 같아.”
“아냐, 난 레몬 껍질 향이 강하게 느껴져.”
“이 여운은 꼭 오래된 극장 같아.”
감각의 언어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다양함이 와인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와인을 마시고, 기억하고, 사랑합니다. 중요한 건 와인을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와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창한 테이스팅 용어나 빈티지 지식보다, 오늘 마신 한 잔의 와인이 기분 좋은 저녁을 만들어줬다면, 이미 그건 충분히 좋은 와인이니까요. 음악처럼 흐르고, 시처럼 번지는 감각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자기만의 풍경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에 와인을 마실 때는 조금 천천히, 빛을 보고, 향을 맡고, 입 안에서 굴려보며, 그 언어에 귀 기울여 보세요. 아무 말 없이도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잔 속의 세계를 감각으로 읽어보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우리는 와인이라는 언어를 조금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 이 와인 한 잔 드셔보세요!
한 모금의 지식
⑯ — 셰익스피어의 잔 속에도 와인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곳곳에는 와인과 술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랑은 포도주처럼 사람을 취하게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죠. 엘리자베스 시대의 와인은 스페인 셰리와 프랑스 와인들이 주류였으며, 상류층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⑰ — 폼페이의 와인 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에서는 수십 개의 ‘와인 선술집’이 발굴되었습니다. 벽에는 가격표와 음주 시 주의사항이 그려져 있었죠.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하루의 끝에 와인 한 잔으로 피로를 풀었나 봅니다.
⑱ — 와인이 기차를 타다: 보르도의 철도혁명
19세기,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철도가 놓이자 파리까지 와인이 빠르게 수송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와인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세계 각지로도 수출이 가능해졌죠. 와인과 철도, 그 의외의 조합이 한 나라의 산업을 바꾸었습니다.
⑲ — 와인을 마시는 엘프? 톨킨의 세계관 속 음료
『반지의 제왕』 속 엘프들은 ‘미스란딜’이라 불리는 상상 속 와인을 마십니다. 이는 장수와 예지력을 강화한다고 하죠. 톨킨은 유럽 중세의 음주 문화를 판타지 세계에 정교하게 반영했으며, 술은 문명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⑳ — 와인은 왜 짠 음식과 잘 어울릴까?
짠 음식은 와인의 과일 풍미와 산미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줍니다. 스페인의 하몽이나 프랑스의 블루치즈, 이탈리아의 프로슈토가 와인과 환상의 짝을 이루는 이유죠. 이는 입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상호작용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