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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그랑크뤼, 작은 마을의 숨은 보물들’

by 콩코드


와인 한 병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지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르고뉴의 본(Bonne), 보르도의 마고(Margaux), 이탈리아의 몬탈치노(Montalcino), 스페인의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 이 이름들은 세계적인 도시의 화려함이나 인구 수로는 결코 주목받지 않는 곳들이지만, 와인의 세계에서는 마치 북극성처럼 찬란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 혹은 산등성이나 강가에 조용히 자리한 이 마을들은, 한 병의 와인을 통해 세계인의 테이블 위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건네는 예술가이자 시인입니다.


이 작은 마을들이 빚어내는 힘은 단지 전통에만 기댄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수 세기 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가 스며 있고, 계절의 순환을 묵묵히 따라온 땅의 인내가 녹아 있습니다. 기후와 토양, 미세한 풍향까지도 고려하는 정교한 감각, 그리고 수확의 시기를 기다리며 매 해를 살아내는 인내심이 하나로 모일 때, 비로소 그 마을의 와인은 ‘그랑크뤼(Grand Cru)’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섭니다.


‘그랑크뤼’란 무엇일까요?


프랑스 와인 분류 체계에서 그랑크뤼는 단순히 ‘좋은 포도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품질을 인정받고, 지역의 명성과 명예를 지탱해 온 유서 깊은 땅에 주어지는 호칭입니다. 마치 위대한 고전 문학 작품처럼,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기준이 되는 이름입니다.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전체 포도밭의 단 2%만이 그랑크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길을 걷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 만큼 소박하고 작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 세대를 이어온 장인정신, 그리고 매 해 쌓여가는 미묘한 기후 변화의 기록이 층층이 겹쳐져 있죠.


그랑크뤼 와인은 단지 '맛있는 와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을 전체의 풍경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입니다. 아침 햇살이 들기 전 안개 자욱한 포도밭을 조용히 거니는 노인의 발자국, 점심 무렵 와이너리의 마루에서 들리는 병마개 여는 소리, 해 질 녘 가족들이 모여 와인을 나누며 지친 하루를 달래는 미소—이 모든 것이 병 안에 담겨 함께 익어갑니다.


예컨대 부르고뉴의 본(Bonne)은 이름 그대로 '좋은(Good)'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호감을 넘어섭니다. 이곳의 포도밭은 기복 있는 언덕을 따라 줄지어 있으며, 그 언덕은 수세기 동안 바람과 햇빛, 비를 맞으며 조금씩 모양을 바꾸었습니다. 그곳의 포도나무는 매년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올 때마다 다시 피어오릅니다. 그 과정을 돌보는 사람들의 손길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자연을 대하는 진지함과 신뢰가 깃들어 있습니다. 본의 와인은 말없이 오래 곁에 있어주는 친구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마시는 이의 마음을 채워줍니다.


° 설레는 날엔–모스카토 다스티 (Moscato d’Asti)

입안에서 춤추는 탄산, 달콤한 복숭아 향기. 첫

데이트처럼 가볍고 반짝이는 너에게.

“오늘은 심장이 아니라 와인이 먼저 두근거려.”


또한 토스카나의 몬탈치노(Montalcino)는 언덕 위의 고요한 마을로, 해질 무렵 붉게 물든 벽돌지붕이 장관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 마을의 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강건하고 깊은 풍미로 이탈리아 와인의 자존심이라 불립니다. 브루넬로의 힘은 마치 그 마을 사람들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빠름보다는 느림을, 효율보다는 기다림을 택하는 이들은 자연이 알려주는 신호를 따르며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숙성시킵니다. 그렇게 숙성된 와인은 단단한 구조와 풍부한 아로마,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여운을 지녔고,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한 마을이 쌓아온 인내와 신뢰의 결과입니다.


작은 마을일수록 와인은 더욱 정직합니다. 이는 시장을 겨냥한 계산된 생산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빚은 시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각 병마다 조금씩 다른 개성이 있고, 해마다 기후에 따라 변주되는 맛은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와인을 느끼게 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샹파뉴 지역의 어느 가족 와이너리는 몇 대째 같은 돌창고에서 샴페인을 숙성시키고 있습니다. 그 돌벽에는 해마다 포도를 수확한 날과 그날 일했던 가족들의 이름이 손글씨로 새겨져 있고, 때로는 고인이 된 어머니의 이름 옆에 간단한 메모도 함께 남겨져 있습니다. 그 병을 여는 순간, 마시는 이는 그 가족의 시간에 살짝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때로는, 진짜 보물은 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은 마을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여행자의 우연한 발걸음으로 들어선 한적한 마을에서, 이름도 낯선 와이너리의 문을 두드렸을 때 가끔 그런 곳에서 만난 와인이, 유명한 브랜드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것은 단지 맛 때문만이 아닙니다. 와인을 내어주던 사람의 눈빛, 잔에 비친 햇살, 그날 오후에만 느낄 수 있었던 공기의 향기 때문입니다. 와인이라는 액체 속에 녹아든 그 순간의 분위기, 사람의 온기가 마치 필름처럼 병 속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양한 평가 기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생산 연도, 품종, 숙성 방식, 점수와 가격… 하지만 어떤 와인은 그 모든 기준을 넘어섭니다. 그 와인은 하나의 장소,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인생과 마주하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그러니 다음에 와인을 마실 때, 병 라벨에 적힌 작고 낯선 마을 이름을 잠시 눈여겨보세요. 그 이름은 단지 지명이 아니라, 수백 번의 계절을 지낸 나무와, 땅과, 사람들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그 병 속에는 수확의 기쁨과 실패의 아픔, 따뜻한 저녁 식탁과 오래된 웃음소리까지 담겨 있을지 모릅니다.


와인이란 결국, 한 마을의 숨결을 병 속에 담아 먼 곳까지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작은 마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한 모금의 지식


⑪ —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와인 농장

천재 화가이자 발명가였던 다 빈치는 밀라노 공작으로부터 작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고, 그의 노트에는 포도 품종과 재배법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와인까지. 그의 삶은 다층적인 향으로 가득했죠.


⑫ — 종교와 와인의 오래된 인연

기독교의 성찬식에서 와인은 예수의 피를 상징합니다. 유대교의 축제인 안식일에도 와인은 축복의 음료로 쓰입니다. 술이 금기인 이슬람 문화 속에서도 과거 아랍인들은 포도를 재배하고, 시로 와인을 찬미하곤 했습니다. 와인은 문화와 신앙 사이를 넘나든 존재였습니다.


⑬ — 빈티지, 숫자 그 이상의 의미

‘빈티지(Vintage)’는 수확 연도를 뜻하는데, 포도 품질은 날씨와 기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와인 애호가들은 특정 해를 ‘전설적인 해’라 부르며 수집합니다. 어떤 해의 와인은 그해의 햇빛과 바람, 땅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는 타임캡슐이죠.


⑭ — 와인은 어떻게 세계를 건너갔나?

유럽 와인은 대항해 시대를 통해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목재 배에 실린 와인통은 흔들리고 기후에 따라 발효가 진전되기도 했죠. 그 결과, 프랑스 와인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셰리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사랑받게 된 것입니다.


⑮ — 프랑스 혁명과 와인의 몰락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귀족의 포도밭을 국유화하며 많은 와이너리를 무너뜨렸습니다. 수천 년 동안 왕과 귀족을 위한 와인을 만들던 포도밭들이 혁명 이후 시민의 손에 들어오며 새로운 와인 문화가 싹텄죠. 와인은 특권에서 자유로, 한 걸음 더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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