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품을 떠나기까지
prologue
결혼 후, 우연히 영화감상 취미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천사담'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 후 토론을 나눴다. 영화는 대구 이현동 재개발 관련 내용이었다. 감독님께서 관객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가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였다. 당시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꾸리고 지내며 '집'이란 공간에 대한 생각이 많던 때라 사람들과 알차고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이 얘기를 좀 더 풀어서 브런치에 올려야지 마음먹었다. 첫 자취부터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집'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집’은 내게 ‘억압’이었다.
화목하지 않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님만의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암묵적인 압박이 숨 막혔다. 남들에 비해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그런 집이었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는 대부분의 딸과 엄마의 관계들이 그러하듯 친한 듯 불편한 애증 관계였다. 엄마를 많이 닮았단 이유로 나는 늘 엄마 편이어야 했고 엄마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나를 본인과 동일시했다.
‘나’는 죽이고 엄마가 원하는 모습만 꺼내놓고 살아야 했다.
서로를 잘 알기에,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아채 눈치를 봐야 하는 순간들이 이어지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외면할 수 없어 돌봐야만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딱 저게 엄마와 나의 관계였고 그래서 ‘집’은 내게 너무 ‘숨 막히는 곳’이었다.
집 밖으로 나와야만 나는 조금이나마 ‘나’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밖에 있길 원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매일 약속을 잡고 혼자서라도 밖에서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니다 집으로 들어갔다.
성인이 되면 자취를 하겠다 다짐했다. 대학교 1학년, 첫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동안 12시간씩 일하며 돈을 모았다. 2학기가 시작하기 전 나는 부모님 동의하에 자취를 시작하게 됐다. 엄마는 처음엔 같은 지역임에도 자취를 하겠단 내 말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내가 영영 나가 사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서운하단 이유로 본가에 남아있는 내 짐을 전부 다 갖다 버렸다.
어찌 됐든 그렇게, 드디어, ‘부모님의 집’에서 벗어나 ‘내 집’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자취를 시작하고 깨달은 사실은 내가 ‘집순이’라는 것이었다. 늘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녀서 친구들이 ‘역마살 꼈냐’고 할 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니던 나였다. 그런데 자취방을 구하고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생기자, 밖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놀 일이 있으면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엄마와 나는 떨어져야 서로가 숨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자취를 시작하고 엄마도 건강이 더 좋아졌다.
부모님은 내보내기 전까진 딸 걱정에 오만상이시더니 지척에 있는 딸 자취방을 일 년 내내 한 반도 보러 오지 않으셨다. 서운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 덕에 나는 10평 남짓한 나만의 숨 쉴 구멍 속에서 ‘나’로서 온전히 숨 쉴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