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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윤 Sep 28. 2024

우린 누군가의 뒤를 밟아오며 성장했다

두 소녀의 작고 소중한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창작혼

룩백은 '파이어 펀치'와 체인소 맨' 작가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만화이다. 영화관을 찾기 전 원작을 감상하고 나서는 기대가 배로 불어났고, 개괄적으로 원작보다 더욱 나이스한 영화였다. 내용은 뻔할 수 있어도 연출이 하드캐리한 만화이기 때문에 영상 매체로 마주했을 때 전달력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귀여운 두 소녀의 만화에 대한 순수한 감정과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스토리라인에 흠뻑 취해 동화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작가라면 특히 공감할 만한 내용이기도 한데,  창작에 있어서 내가 왜 이 행위를 지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를 전달한다. 영화 『룩백』은 58분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배스킨 라빈스의 아이스크림처럼 꾹꾹 눌러 담아냈다.






『룩백』의 카메라는 후지노의 등을 많이 비춘다. 룩백에서 「등」은 많은 함의를 내포하기도 하며 서사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제목 그대로 “내 등을 봐줘!”라고 외치며 작가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첫 번째와 우리는 누군가의 등(동경의 대상)을 바라보며 성장한다는 두 번째 속뜻을 가진다. 두 소녀는 만남이 시작되고부터 서로에게 있어 성장의 발판이 된다. 후지노는 쿄모토라는 팬을 등에 업고 만화를 다시 그리게 되고, 쿄모토는 후지노를 통해 방으로부터 나와 세상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둘은 단숨에 호혜적 관계로 발전하며 둘의 이름을 딴 '후지노 쿄'라는 필명으로 단편을 그리고 공모전에 입상까지 하며 환상의 만화 콤비로서 일약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끝까지 하나로 혼연일치되기란 어려운 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후지노 쿄 콤비가 바라보는 목표지점은 달랐으며, 쿄모토는 그림을 더욱 잘 그리고 싶다는 꿈을 안은 채 이젠 서로에게 등지며 각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에게 이별은 서로에게 있어서 성장의 멈춤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중하는 씬들이 나열될 때면 우리가 어떤 일을 처음 접할 때 패기 넘치고 모든 것을 배움의 자세로 받아들이겠다는 초심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 그저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과 관성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태도만을 보인다. 후지노는 샤크킥의 연재보다는 변명이 앞서고, 쿄모토는 잘 그리려는 의지보다는 어려움이 앞설 때 이 행위를 왜 좋아하고 선택하게 됐는지 망각해 버린 상태다. 오래다. 그리고, 쿄모토의 사건(계기)이 터지고 나서야 초심이라는 영점이 잡혀가기 시작한다.






웹툰 작가 지망생 시절 나의 작업실

창작자라면 룩백을 통해 작품 생활을 이어 나갈 동력을 전달받는다. 「창작 이퀄 고통」이란 말이 있듯이, 창작자란 어둡고 고요한 동굴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존재들이다. 후지노가 책상 앞에서 만화에 열중할 때면 창문 너머로 다른 공간인 듯 아닌 듯 사계절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 모습은 마치 창문 밖의 세상을 스리슬쩍 쳐다볼 여유조차 찾아볼 수 없는 창작자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당장 뛰쳐나가도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어루만지듯 달래는 중요한 씬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자리에서 어떤 무언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릴레이를 이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 창작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뇌하며 맹렬히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창작자가 보여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후지노에게는 더 이상 창작자의 등을 보이는 대상(쿄모토)이 없다. 호혜적 관계를 이루던 둘의 갈라섬의 결과는 샤크킥이 11권에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자극을 받거나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바라볼 등(동경의 대상)이 없어지자 동력을 잃어버렸다. 유아기 땐 부모를 청소년기에는 선생님 또는 재능 있는 친구를 성인이 되어서는 선배를 군대에서는 전우의 뒷 발을 바라보며 우리는 걸어왔다. 바라볼 「등」이 있었기에 성장해왔다.






한편으로, 후지노와 쿄모토의 관계를 '작가'와 '독자'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후지노는 자신으로 인해 이 사단이 발생했다고 자책하지만, 둘은 서로의 「등」을 보고 자란 것이다. 후지노는 독자(쿄모토)를 위해 다시 펜대를 잡았고, 단편을 그렸으며 공모전에도 입상했다. 쿄모토도 작가(후지노)가 아니었다면 더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물론 대학 진학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창작물은 독자로 하여금 존재하고 생명력을 가진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서로가 있기에 성장할 수 있고, 서로의 뒤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후지노는 그 깨닮을 쿄모토의 방문 너머로부터 발견한다. 샤크킥 팬의 방에서 자신이 다시 한번 펜대를 잡아야 할 이유를 말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어시스턴트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작품으로서 다가가기로 마음먹으며 등(룩백)을 내보인다.






『룩백』은 창작자들에게 헌정하는 영화다. 후지노가 라이벌이라 여겼던 쿄모토가 사실 자신의 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감정을 토해내듯 춤을 추는 발걸음은 마치 봉산탈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은 룩백의 가장 인상적인 연출 중 하나로, 작가로서 첫 독자를 만나며 프로로서 발돋움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상징한다. 스토리라인은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원작을 접한 이들에게는 영화광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연출을 영상으로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특히 개성 넘치는 러프한 그림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두 소녀의 작고 소중한 이야기가 괜스레 울컥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만큼 룩백은 깊은 여운을 남기며, 창작자들에게 다시금 초심을 일깨우고 예술혼의 불씨를 되살려준다. 58분의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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