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라는 키워드가 맞춤옷처럼 어울리는
자신만의 감각을 나타내는 <우디 앨런> 감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자연스레 보게 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그러다 토요일 밤 저녁과 함께 어울릴만한 영화를 찾다가 추천받은 일이 떠올라 곧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재생하게 됐다. 가볍게 볼 마음으로 시작했던 영화가 어느새 방의 불을 다 끄고 감상하게 할 만큼 파리가 주는 분위기는 환상이라는 키워드와 맞물렸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토요일 저녁 같은 여유와 깔끔한 재미를 가지면서도 곳곳이 유쾌한 재치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대가들이 진짜 그랬을 법한 섬세한 묘사들로 가득해서 이 또한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그중 자신을 천재라고 칭송하던 <달리>의 괴짜 같은 모습을 애드리언 브로디가 정말 멋지게 소화해 내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인공 길(오웬 윌슨)은 할리우드 작가라는 번듯한 직업을 내려놓고 소설가를 꿈꾸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래서 길의 눈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거쳐 간 파리의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파리의 절경에 눈이 먼 길은 원래 계획은 뒷전이고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에게 결혼하면 프랑스에 와서 살자고 제안하지만, 현실감 없는 꿈같은 소리라며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네즈. 둘은 시작부터 대립될 징조를 보이는데, 동반자인 이네즈는 물론 그녀의 부모님도 길에게 자주 핀잔을 주는 모습에 과거 웹툰 작가를 준비하던 내 자신이 떠올라 그들이 너무나도 눈꼴사나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연히 마주친 이네즈의 대학 동기들과 동행하면서 길은 과거라는 낭만에 취해있는 아픈 사람처럼 치부되며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 특히 이네즈가 길의 말을 자르고 폴의 의견만을 치켜세울 땐 오히려 자신의 주변 사람이 더 상처를 주는 모습과 같아 가슴이 아파졌다. 예술이라는 낭만을 찾아 여정을 떠나려는 길을 위해 응원해 주는 이는 '현실'에서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시대가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착각은
현실에 적응 못하고
낭만 적인 상상에 빠진 사람들의 결점이지
- 폴이 길의 소설을 지적하며 하는 대사
길은 그렇게 그들과 어울리길 거부하고, 술에 취해 파리 시내를 방황하던 중 꿈만같은 환상을 마주한다. 자신이 동경하던 예술가들이 실존했던 과거의 시대로 덩그러니 떨어진 것이다. 종소리와 함께 그를 과거로 안내하는 고전풍의 자동차는 길을 암울한 현실로부터 단절시켜 준다. 낭만이 즐비하던 프랑스의 1920년대는 길이 동경하던 대가들이 모여 예술에 대해 토론하고, 그를 반기며 그의 꿈을 응원한다. 현실에선 무시받고 인정받지 못하던 길은 이 환상에 취해 낭만주의적 갈증을 해소해 간다. 본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향수nostalgia'를 팔며 과거를 그리워만 했다면 이제는 직접 황금 시대에 놓여지며 황홀한 나날이 펼쳐져 간다.
이미 많이 회자된 예술가들은 제외하고 길에게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유일한 픽션 캐릭터인 ‘아드리아나’이다. 길의 소설에 흥미를 보이며 둘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길은 약혼녀가 있음에도 아드리아나에게 단숨에 빠져든다. 로맨틱한 시간을 나누며 서로에게 점점 깊어지는데, 길은 그녀 또한 자신처럼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난 과거만을 그리워하는 몽상가임을 알게 된다. 길에겐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스타인, 피카소 등 많은 대가들이 존재했던 1920년대가 황금기였었지만, 아드리아나에게 있어 <벨 에포크> 1890년대가 더욱더 황금기라 생각하며 동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번 더 과거로 향하는 마차가 한 대 나타난다.
길이 대가들을 만나 느꼈던 황홀한 감정처럼 아드리아나도 로트랙, 드가, 고갱과 대화를 나누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파리의 전성기와 함께하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길에게 그런 아드리아나의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인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는 계기가 된다. 벨 에포크의 예술가들조차도 현세대는 공허하고 상상력이 없다는 볼멘소리와 함께 비판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고 있었다. 길은 깨닫는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만을 그리워하면 멈춰있게 된다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환상을 없애야 한다고 말이다.
가치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환상들은 없애야 해요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란 환상도... 그중 하나겠죠
- 길이 벨 에포크에 머물려는 아드리아나에게
아날로그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미드나잇 인 파리가 주는 메시지는 씁쓸했다. 나도 꽤 과거를 그리워하며 공상해 왔던 사람이었고 후회를 달고 살았다. 아직도 과거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나간 일은 좋은 기억만 남기에 달콤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과거만을 추억하고 미련을 둘수록 현재에 만족하기 힘들었고, 발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술자리에서 왕년에를 외치며 무수한 과거 얘기만을 늘어놓는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힘들더라도 지나간 일은 훌훌 털어내고 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주는 메시지가 심플한만큼 깊게 생각할 필요없이 내용이 쏙쏙 박히는 영화였다. 환상이라는 키워드가 맞춤옷처럼 어울리다보니 <라라랜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편의 동화같은 아니면 허몽처럼 꿈을 꾸다 일어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꿈에서 깨어났으니 결정해야만 한다. 잠시의 일탈로 마무리 지을 것인지, 아니면 과거라는 늪에 빠져 환상에만 매몰될 것인지 말이다. 길은 이제 자정에 종이 울려도 더이상 과거로 가는 차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파리에 살기로 결심했다고.
다른 시대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다,
사진이 보이네
난 영화가 보여
난.. 코뿔소가 보여
- 길이 달리 일행을 만나며
P.S.1 내가 동경해오던 작가들을 실제로 마주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이노우에라든지 토리야마가 눈앞에 있는 상상을 해본다.
P.S.2 길이 레코드숍 직원과 연결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반전 그런데 잘 어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