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바보 종대 21화

나를 유기한 자리,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당뇨견과 함께 살기

by 규아

종대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존재였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던 때 아이는 내 곁에 있었다. 또 바닥에 떨어졌다고 믿던 순간 나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그건 2년 전, 의회에서 쫓기듯 내려왔을 무렵의 일이었다.


의회에서의 마지막 날, 책상 위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낡은 컵, 볼펜 몇 자루, 서류 더미가 사라진 자리에 먼지만 남았다. 복도로 나서자, 오래전부터 따라다니던 고함이 환청처럼 들렸다. “다 너 때문이다! 모든 게 네 탓이야!!”


공식석상에서의 실언, 투기와 비리 의혹 보도가 쏟아질 때마다 내게 몰아치던 질책.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분풀이할 약자와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한밤중도, 휴일에도 휴대폰 너머로 “야, 야!”거리며 내지르는 큰 소리는, 내 존재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 틈을 타, 비위를 맞추려는 이들이 조직의 장과 함께 나를 몰아세웠다. 결국 인사 하루 전, “내려가라”는 말이 떨어졌다. 마침 사이가 틀어진 직원이 얹은 말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무엇보다 마음을 나눴던 동료들이 나를 발판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깊이 베였다. 이 조직에서 자리는 법과 원칙이 아니라, 줄을 대고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힘없는 공무원은 손쉬운 희생양이 되었고, 서로에게 돌을 던지게도 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절대 내려가면 안 된다”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함께한 시간보다 한 마디의 모략이 더 깊게 작용했다. 어느새 나는 ‘직원과 사이가 나쁘고, 내부 일을 기자에게 흘리는 사람’으로 둔갑해 있었다.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집행부 비판 기사를 쓰던 일, 사비를 들여 기자들을 달래던 기억은 그 순간 먼지처럼 흩날렸다.


조직의 장은 “내려가면 원하는 부서로 보내주겠다.”라고 했다. 의원들도 이왕이면 희망 부서로 가라고 했다. 당황한 나는 진심으로 가고 싶은 곳을 말했다. 그 업무에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인사 라인에서는 이미 그 자리에 ‘임자’가 있다고 했다. 결국 내가 가게 되자, 인사국장은 복수하듯 말을 던졌다. “왜 이렇게 적이 많아? 조심해.” 그제야 알았다. 이제 나를 불러줄 곳이 없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종대가 방석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깊은 눈빛이었다. 세상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진 생명 같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이라는 이유로, 내가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나는 한참을 옆에 앉아있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너도… 우리 둘 다 버려졌구나.”


그날 이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지냈다. 그러나 종대는 늘 눈을 마주쳐주었다. 혼자 술을 마시면 말없이 다가왔고, 눈물을 흘릴 때면 등을 맞대주었다. 그 체온이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다.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었던 조직에서 밀려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끈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후회와 좌절, 배신감 속에서 방황하던 어느 날, 종대가 쓰러졌다.


나는 건강했지만 마음이 부서져 있었고, 종대는 밝았지만 몸이 점점 무너져갔다. 결핍의 모양은 달랐지만, 그 결핍이 우리를 단단히 묶어주었다. 나는 매일 약을 먹이고, 주사를 놓고, 눈을 소독하며, 산책을 했다. 그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알았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일상이, 생명을 붙드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정말 중요하다고 믿었던 일들이 한낱 모래성에 불과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라져선 안 될 공기 같은 것들이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종대, 우리 가정, 그리고 나 자신. 그곳이야말로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진정한 ‘자리’였다.


종대는 십여 년을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다가, 길을 잃은 나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버려졌다고 좌절했던 나는, 사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세상에서 내던져진 줄 알았던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야말로,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나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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