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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위로, 돼지곱창에 소주 한잔

소박한 한잔의 위안

by 규아

처음 곱창볶음을 맛본 건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동네 어귀마다 포장마차가 하나씩 자리하던 시절, 옆집에 살던 피아노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연탄불 앞에 세워놓았다. 처음 베어 문 곱창은 질기기만 하고 매웠다. 그런데 연탄불에 그을린 탄 맛이 묘하게 입안에 남았다. 그 질김을 덮어주는 깻잎의 고소함. 그날 이후 나는 곱창을 졸라대곤 했다. 그때의 곱창에는 늘 작은 종이컵의 콜라가 함께였다.


세월이 흘러, 나의 곱창 옆에는 콜라 대신 소주잔이 놓였다. 아이들과 살던 아파트 단지에 금요일마다 장이 섰다. 야채와 당면이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갈 때, 나는 소주잔을, 아이들은 콜라를 들었다. 그 금요일 저녁의 한 상은, 타지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에 매달리던 내게 작은 위안이었다.


경기도의 곱창은 부드럽고 야채가 많았지만, 고향 군산의 곱창은 질겼다. 당면 없이 곱창 자체를 연탄불에 구워냈다. 그 중간에서 늘 방황했다. 떠나온 땅의 부드러움과, 돌아온 고향의 질김. 그 맛의 차이는 내 삶처럼 애매하게 씹히고는 했다.


오늘도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소주 곁의 곱창은 여전히 질기고, 씹을수록 탄향이 진하게 번진다. 입안에 퍼지는 것은 고소함이 아니라, 잘게 부서지는 지난 기억들이다. 포장마차의 불빛, 금요일 저녁의 아이들, 타지의 밤거리. 모두가 선명히 떠오르지만, 붙잡을 수 없는 잔상처럼 허무하게 스쳐간다.


고향이 그리운지, 타지가 그리운 지조차 알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 두 그리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곱창 한 점에 술 한 모금을 더해도 허전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다만 그 씹힘 속에서, 지난 시간들이 은근한 향처럼 되살아올 뿐이다.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고, 공허도 여전히 곁에 있다. 나는 오늘도 질긴 곱창을 씹듯, 하루를 삼킨다. 그렇게 하루가, 또 넘어간다.


곱창 한 점, 소주 한 잔

질기게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외로움,

한 모금의 술은

삶의 허기를 덮는다

그렇게 또 하루를

묵묵히 삼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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