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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빚은 맛, 나나스케

소소행(小笑幸), 직장인의 1인 밥상

by 규아

전라도 군산에 오면 낯선 반찬 하나를 만난다. 나나스케


나나스케, 나나스끼, 나라즈케라 불리기도 하는 이 음식의 이름은 울외 장아찌 혹은 주박 장아찌다. 일본식 이름이라 다소 낯설지만,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삼국시대부터 부유층이 별미로 즐겨온 우리의 음식이다.


울외는 박과에 속하는 넝쿨식물이다. 이걸 술지게미에 절여 만든 장아찌가 울외 장아찌다. 입에 넣으면 먼저 짠맛이 다가오고, 곧이어 술지게미에서 배어 나온 은근한 단맛이 밀려온다. 아삭한 식감과 단짠의 조화가 입안 가득 퍼지며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군산에서 재배된 울외와 청주 양조장이 번성했던 지역적 특성이 어우러져 자리 잡은 군산의 밥상.


울외 장아찌에는 군산의 역사가 담겨있다. 군산은 ‘쌀의 도시’이자 ‘술의 도시’였다. 곡식이 풍부하고 항구가 있는 물류지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술 문화도 발달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 청주 양조장이 번성했고, 해방 이후에는 백화양조(현 롯데주류) 공장이 들어섰다. 이렇게 술을 빚고 남은 술지게미는 울외와 만나 장아찌로 숙성되었고, 이 지역의 밥상에 뿌리내렸다.


쌀과 술, 그리고 지역 특산품이 포개진 역사가 곧 군산의 밥상이다. 요즘은 술을 직접 빚는 곳이 드물어 술지게미를 구하기 어려워져서 울외 장아찌가 귀한 음식이 되었지만, 군산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랑받는 음식이다.


한 번은 군산에 놀러 온 분이 이 장아찌를 신기하다며 사 갔다. 며칠 뒤 걸려 온 전화로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 “그렇게 짠 걸 어떻게 맛있다고 했어?” 알고 보니 나나스께는 물에 담가 짠맛을 빼고 비칠 만큼 얇게 썰어야만 제맛이 나는데, 두툼하게 잘라 그대로 드신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음식에는 ‘먹는 법’이 있고, 그 방식이 맛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외갓집 식구들은 유난히 울외장아찌를 좋아했다. 밥 한 숟갈에 얇게 썬 장아찌 한 점만 올려도 한 끼가 충분했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한여름, 찬밥에 물을 말아 나나스께를 곁들이던 기억은 더위를 식혀주는 작은 위로였다. 울외 장아찌의 풍미가 혀끝에 스칠 때, 나는 오래전 외갓집 부엌으로 돌아간다. 그 시절 여름의 더위와 가족의 웃음, 그리고 발효된 추억의 깊이가 함께 밀려온다.


얇게 썬 나나스께는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통깨와 참기름을 더하면 또 다른 별미가 된다. 요즘은 김밥에 단무지 대신 넣기도 한다. 인공감미료 대신 오랜 숙성의 맛을 찾는 이들, 낯선 풍미를 즐기는 미식가들이 다시금 이 음식을 알아가고 있다.


삼국시대의 술지게미 절임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즈케로 불리다가, 다시 군산에 온 울외 장아찌. 단출한 밥상 하나에 이천 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셈이다. 쌀을 실어 나르던 군산항, 술 양조장이 즐비했던 도시의 기억이 짭조름한 한 조각에 스며 있다.


울외 장아찌의 풍미가 혀끝에 스칠 때, 나는 몇십 년 전 외갓집 부엌으로 돌아간다. 그 시절 여름의 더위와 가족의 웃음, 그리고 숙성된 추억의 깊이가 함께 밀려온다.




서로 스며든 시간


술지게미가 울외에 스며들고,

울외 또한 술지게미를 품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며

달큰짭조름하면서도 은은한 시간이 피어난다.


수천 년을 건너,

삼국시대에서 일본의 바다를 지나

다시 군산의 밥상 위에 닿은 역사의 한 조각


켜켜이 쌓인 세월 중 한 점을 집어 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의 여름을 바라본다.






오늘의 1인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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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불면 군산에는 꽃게가 한창이다. 갓 잡은 꽃게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 끝물 호박잎쌈과 울외장아찌, 그리고 소박한 밑반찬으로 차려낸 초가을 밥상. 짭조름한 울외 장아찌와 꽃게의 향이 겹쳐진 가을 바다의 맛과 기억을 입안 가득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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