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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라 Jul 12. 2021

첫 작품 상봉장과 그 남자

작품과 비하인드 스토리 (1)

이 작품은 내가 극작가가 될 수 있게 해 준 첫 작품이다.

그때 나는 대구의 개나 소나 라는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개나 소나란 뜻은 70 개띠에서 73 소띠들의 공간이란 뜻이었고

낀 세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물론 그 상호에도 또 다른 비하인드가 있었다.

당시 대구는 세계육상선수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구청에서 혐오 간판을 정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온 연락은 가게 상호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아니 개나 소나가 왜 혐오 간판일까? 훗날 개그맨 전유성 씨는 청도로 내려와 개나 소나 콘서트도 했었는데.....

내 고민은 손님들의 기지로 해결되었다.

그때 우리 집을 사람들은 견우네라고 불렀다. 개 견자와 소우자를 써서 그들끼리 견우네라고 불렀는데

나는 간판을 견우네라고 고쳤다.

손님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그래서 개나 소나는 어느 날부터 견우네가 되었다.


그곳에는 꽤 많은 예술인들이 손님으로 왔던 가게이다.

가게 안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었고, 조율되지 않은 그 피아노에는 많은 음악인들이 연주를 하곤 했었는데

그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 성기문 씨였다.

그들이 가게를 방문하는 날에는 낡은 술집은 재즈바가 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경북대 음악동아리들의 OB 멤버들도 왔었기에 독일로 유학 간 그들이 고향을 방문하는 날에는

제일 먼저 가게를 찾아와 노래를 해 주곤 했고, 그곳에서는 콘트라베이스, 대금. 트럼펫,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와 같은 악기들이 연주되기도 했고, 대구지역의 유명 합창단인 예노을 합창단의 아카펠라도 종종 들을 수가 있는 그런 장소였다.


그곳이 삼덕동의 웨딩 골목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웨딩사업을 하시는 손님들도 많이 왔는데

그들과 함께 왔던 사람들 중 한 분이 내게 물어봤다.

"사장님이 소설도 쓰신다고 들었어요. 혹시 희곡에 관심 있으세요?"


희곡이 뭔지 몰랐던 나.

연극이라고는 단 한번 본 적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간단했다.

"그게 뭔데요? 저 그거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러자 그 남자는 나보다 더 간단하게 말했다.

"그냥 대사와 지문을  나누면 돼요. 간단해요."


물론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았지만, 나는 그 희곡이란 걸 작업해보기로 맘먹었다.

왜냐면 그 걸 제안한 남자가 잘생겼기 때문이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논리인가!


그렇게 상봉장은 매일매일 대사를 고쳐가면서, 상황을 고쳐가면서

나의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연극 대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해 시월에 그 작품을 '한울림'이란 극단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뭐 서로 간의 사정에 의해서 처음 내게 그걸 제안한 사람이 연출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지금 한울림의 대표인 정철원 대표가 연출하게 되었다.


아.... 할. 많. 하. 않


나는 이 작품을 올리고   그 작품의 5회 공연을 빠짐없이 관객석에 앉아서 관람을 했다.

그때 그 감동 때문에 나는 그날부터 극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쓴 대사를 연기하는 배우와 그들의 연기에 울고 웃는 관객들을 보는 내 마음에는

무언가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상봉장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이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썼는가! 이 작품은 무슨 내용인가를 말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내게 처음 희곡을 제안한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이름은 최정운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후배 달봉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분이 작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왜? 언제? 어쩌다가?

놀라 물어보며 눈물을 흘리는 내게 달봉이가 해준 말은

"작가님. 검색해보세요. 그분 아르바이트하러 경주에 갔다가 눈사태가 나서 대학생들 피신시키다가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한참 기사 검색을 했다.

그 다운 죽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될 말이지만 그의 죽음은 의로웠고. 그의 죽음은 경건했다.


그분은 사람이 가지는 욕심이란 게 없는 분이었다. 청렴결백, 선비 뭐 이런 단어들이 떠 오를 정도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속세에 찌든 사람 같았었다.

그래서 늘 대구를 방문하면 대구 연극계의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찾아가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바로 그분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시던 그 해는 내가 중국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사고 소식을 몇 해 지나서 우연찮게 술자리에서 듣게 되었고

그 술자리의 마지막은 눈물이었다.


내게 극작가라는 타이틀을 주신 분.

그리고 늘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를 성장하게 하셨던 그분

내 첫 작품은 그분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그 제안의 가장 기억 남는 대사는

"희곡은 대사와 지문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장소도 그 어떤 것도 구애받지 말고 쓰세요."


그분이 나의 첫 작품을 연출 하시진 못했지만

그로부터 이 년 뒤. [비보호 좌회전]이라는 실험극으로 같이 작업한 적이 있었다.

사창가에서 일하는 세명의 여성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당시 내용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작가료로 받은 이십만 원의 돈을 그대로 들고 쫑파티 날 난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정운 씨. 내가 이 돈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거 같아요. 수고하신 배우님들에게 드리세요"


유일했었다.

내가 작가료를 거절한 것은.

나는 대구에서 돈 밝히는 작가로 소문나 있었다.

왜냐면, 돈 밝히는 대표들이 판을 치는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열정 페이란 말도 없었을 때, 작품 올려주는 게 어디야?라는 생각으로 작가들의 창작품이 마치 극단의 것인 양 하는 대표들에게 공연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유일한 작가였다.


내게 그 권리를 가르치고 작가로서 가장 빛나는 대우를 해주신 분이 바로 최정운 연출님이었다.

지금도 누군가의 경조사에 극작가 이성자라는 화환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기에

나는 내 직업란에 극작가라는 말을 쓸 때마다 그분을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더욱 그분이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고 그분을 만난 건 내 나이 서른두 살 때였고, 내 직업이 바뀐 것도 서른두 살 때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던 극작가도

언제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오늘은 극작가로 살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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