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삶에 관한 유일한 판단 기준

독립성이란 것

by 전찬우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내가 제대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사실 때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의식적인 관점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사실상 매일 매 순간 그것을 궁금해하고 틈만 나면 평가하려 든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고, 남의 행복이나 불행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하고, 남이 얻은 행운은 질투하고, 남이 성취한 성과에는 열등감을 느끼며, 내가 얻은 행운은 우쭐해하고, 내가 성취한 성과는 우월감을 느끼며 어떤 식으로든 남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거나 알아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관점에서 비교, 잘난 척, 관심 병, 자랑 등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종류의 감정들은 바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평가할 것인가?이다. 이것만 명확했다면 삶이 힘들 수는 있어도 그리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돈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잘 살고 있음의 증거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서 절대적 확신은 할 수 없다. 많은 인간관계나 좋은 인간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도 잘 살고 있음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각종 경조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는가 혹은 당사자가 죽어 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켜주는가에 따라 잘 살았음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이에 비해 얼마나 건강하게 살고 있는가도 흔하게 쓰이는 근거가 된다. 비슷하게, 사는 동안 얼마만큼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얻었는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다양하고 특별한 경험을 했는가? 삶 속에서 마주한 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냈는가?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얼마나 대단한 도전을 했는가? 등등도 자주 기준점으로 작용하곤 한다.


잘 살고 있음의 증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굵직한 것들만 나열했지만 사실 따지고 들면 너무도 다양해서 그 숫자를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정말로 잘 살고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주변을 바라보고 비교를 하는데 실제로 그것에 대한 그 무엇도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이 매일 매 순간 그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잘 살고 있어야 미래에도 잘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병장수를 하기 위해서 매일 매 순간 내가 제대로 잘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잘 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은 다들 나이가 들어서 어려 보이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흔히 어른이 되고 싶은 이유들로 꼽히는 술, 담배, 사랑과 같이 성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저 강해지고 싶어서 그랬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싶었고, 어렸을 때는 언제나 어른이 강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러니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먄약 개구리가 강해 보였다면 어서 빨리 개구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어린 시절뿐만이 아니라 어른이 된 후에도 늘 더 강해지고 싶어 한다. 단지 강함의 조건이 어릴 때에 비해서 좀 더 다양해졌다.


어렸을 때는 주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우린 힘센 어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만화영화에는 훨씬 더 강한 힘을 기반으로 한 영웅들을 보면 엄청나게 끌리게 된다. 어른이 되면 좀 다양해지는데, 비록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한 영웅이 나오는 영화에 끌리 듯이 여전히 강한 힘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보다 지능, 지위, 재산, 사회적 영향력, 업적, 직업 등등이 강함의 또 다른 판단 기준이 된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주 어렸던 시절의 우리는 그저 어른이면 다 강한 존재로 느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우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지 않고 나에게 잘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른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우리는 그 사람의 힘, 똑똑함, 직업, 재산, 지위에 상관없이 그저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을 좋아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유독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와 세상 간의 첫 번째 관계 설정이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 되면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어떤 식으로든 분별력이 생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누군지 따지지 않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무조건 호감을 느끼던 시절에서 이젠 내가 그것이 강한 것이라고 믿는 특정 조건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만 호감을 느끼는 시기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가진 강함이란 것은 다른 말로 매력이라고 칭해지며, 이 매력은 각자마다 서로 다른 취향에 따라 선택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육체적 힘에, 누군가는 똑똑한 머리에, 누군가는 아름답거나 잘생긴 외모에, 누군가는 다양한 재주에, 누군가는 고운 노랫소리에, 누군가는 아주 잘 그리는 그림에, 누군가는 해박한 지식에, 누군가는 엉뚱한 성격에, 누군가는 재미난 유머에 끌린다.


이렇게 사춘기가 되면 우리는 서로 자신이 선호하는 매력이 생겨나고 자신이 매력을 느낀 상대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단지 여기에서 문제는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친해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상대가 원하는 매력을 갖고 있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엄청나게 희생을 하면서 억지로 친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끝이 그리 좋지는 않다.


내 주변 사람들을 구분하고 분리해서 내가 매력을 느낀 상대들과 어울리려고 하고, 내가 별로 매력을 느끼는 못하는 사람들은 아예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 우리들 대부분이 거쳐 온 학창 시절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안엔 여전히 강함에 대한 동경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단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선호하는 매력이 바뀌게 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서서히 바뀌긴 한다. 하지만 그 매력의 대상이 외모에서 돈으로, 똑똑함에서 성공으로, 힘에서 건강으로, 강해 보이는 성격에서 자상한 성격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강함의 기준이 되는 매력만 바뀌는 것이다. 이 지점이 두 번째 관계 설정 단계이다.


사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강함을 기준으로 사람을 선별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더욱더 강함에 더 끌린다. 강한 사람과 친해지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강함에 대한 끌림은 내 생존본능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모두 다 자신만의 고유한 분별심이 생겨버린 어른들은 이제 끝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을 기준으로 수 없이 많은 관계의 이합집산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기에 강함에 대한 끌림이란 현상이 삶의 난이도를 너무 높이고 만다.


누군가와 만나다가도 더 매력적인 상대와 관계를 맺을 기회가 되면 만나던 사람과 서서히 멀어지며 새로운 관계 쪽으로 향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내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한다. 내가 하면 상처를 주는 것이고, 남이 하면 내가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관계이다.


학창 시절부터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온 사람들은 이제 크게 세 가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하나는 원래 했던 대로 이후 남은 삶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거에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잘나 보이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친해지려 애쓴다. 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서서히 무뎌진다.


두 번째는 인간관계라는 것 자체가 가진 고질적 문제를 인식한 후 자신의 주변에 아주 크고 견고한 벽을 세워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편과 네 편을 확실히 구분한 후 내 편 안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대한다. 대부분의 경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 되며, 벽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타인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이 둘 모두 실패한 채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 아예 관계 자체를 맺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라는 곳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이런 인간관계의 원리를 명확히 이해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여기가 세 번째 관계 설정 단계이다.


이것은 두 번째 단계에 나온 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로 벽을 세웠느냐 아니냐의 여부이다. 거대한 벽을 세우고 세상과 내 편의 기준을 나눈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안전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고 만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은 벽을 허문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고정되지 않는다. 평생 믿을 수 있는 매력적인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아니, 찾는다기 보다 그런 인연이 이어지길 바라며 기다린다. 그러니까 거기엔 어떤 배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우연히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이쯤에서 우리가 왜 강함을 기준으로 매력을 느끼고, 또 그것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물론 강함에 대한 끌림은 당연히 내가 약하기 때문인데, 결국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나의 종속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그만큼 거기에 종속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되거나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아주 좋은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내가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냉장고에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은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고장 나면 새로 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전을 지켜주거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사라지면 대안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게 된다. 심지어 내 장기를 내어줄 수도 있다. 너무 소중하면 내 목숨도 내줄 수 있다. 소중한 상대가 없는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중한 존재를 살리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좋아 보이지만, 본질은 그저 대상에 대한 깊은 종속성이다. 우리가 모든 존재들에게 독립적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이용만 하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네 번째 관계 설정 단계가 된다.


내가 온전히 강해지게 되면 외부에 존재하는 강함에 끌릴 필요가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 편, 네 편이 사라지고, 가족의 경계도 사라지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조차도 무의미해진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쯤 다다르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벽히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결국 지금껏 나열한 네 가지 단계는 각각 얼마나 독립적인가 여부로 구분이 되며, 앞의 세 단계는 비슷하지만 네 번째 단계는 완전히 다른 단계가 된다. 그래서 네 번째 단계에 다다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극소수이며, 그러다 보니 이런 분들은 세상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알려진다. 그래서 그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종교화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되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가 이 세상의 모든 타인으로부터 독립이라면 이 마지막 단계는 오직 나 자신으로부터 독립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의 생과 사로부터 초월하는 것이다.


사실 누가 이 단계에 들어섰는지 여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알아볼 눈도 없고 만날 기회도 없다. 단지 불교에서 말하는 '내가' 사라지는 마지막 깨달음의 단계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완벽히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래서 스스로 온전히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동안 내면에서 들려오던 '살고 싶다는' 절규가 멈춘 상태라서 그럴 것이다. 할 수 없으니 상상만 해보는데도 대단한 수준의 평온함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판별할 수 있을까?


이제 그 답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독립적인 존재인가를 보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남을 쳐다본다고 해서 알 수 없다. 오직 내가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종속성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있다.


독립성은 내가 그것이 없어도 조금 불편하긴 해도 큰 문제없이 잘 살 수 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냉장고나 세탁기가 좋은 예다.


남들이 많이 가진 돈은 오히려 그 사람의 돈에 관한 종속성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 지위도 그렇다. 그것이 기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우월하게 느끼겠지만,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노예를 데리고 사는 주인과 같다. 노예가 죽거나 떠나거나 배신을 하면 주인은 아무것도 못해서 죽고 만다. 정말로 누가 더 노예인 것인가?


무엇인가가 없다고 해서 살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의 노예란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반적으로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다들 돈에, 권력에, 집에, 직장에, 관계에, 가족에 자발적 노예가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남을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사람들이 가진 외모, 똑똑함, 많은 돈, 강한 권력, 인기, 관심, 영향력, 행복한 가정은 그저 그 사람의 종속성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시선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종속성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물론 당연히 엄청 많다. 하지만 우리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전기나 수도가 없으면 살기 힘들다. 그게 나를 살리는 공기나 먹을 것은 아니지만 너무 거기에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도 아니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엔 당연했고 지금도 수도가 없이, 전기가 없이,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그러니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너무 익숙해져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나온 지 이제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이 없으면 삶을 살아갈 수 없고 느낀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특정한 능력이든 상관없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있으면 편한 것이 되는 순간 우리는 유일하게 독립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겁이 많고 아직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것은 방향성은 될 수 있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대신 내가 조금이라도 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 처음의 작은 차이가 죽을 때쯤에 되면 아주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두려움 속에서 죽어 갈 것이고, 누군가는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죽는 순간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가진 독립성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끝없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밥값이라는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