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추운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했던 우리의 조상들에게 따뜻한 모닥불과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줄 수 있는 동료들은 생명줄 그 자체였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감성에 빠지고,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의 안부전화 한 통에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은 아주 ‘가끔’이다. 우리는 이제 불을 피우며 야외에서 자는 것을 ‘캠핑’이라고 부르고, 친구들과의 모임은 뭉클함이 아닌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즐겁지 않으면 그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안전을 위해서 모닥불을 피우거나 내 안전을 위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충분히 안전해진 이 세상은 혼자 살아도 얼마든지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외로움’이란 감정에 노출되고 만다.
그 감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아주 갑자기 불쑥 찾아온다. 초대를 한 것도 아니고, 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몰려든다.
직장 상사에게 심하게 깨져서 친구를 만나 속풀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날따라 모두 바빠서 딱히 만날 사람이 없던 날 밤, 주말에 있었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면서 딱히 할 일이 없어져버려서 어영부영 주말을 보내고 난 일요일 밤 잠들기 전,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주방 싱크대에 쌓여있는, 어제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은 접시들을 볼 때, 우리는 갑자기 낯선 감정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TV를 켜고, 유튜브를 본다. 비록 모니터 속이지만, 사람들이 나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다. 비록 그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모니터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창백한 따뜻함으로도 조금 위로는 된다.
그렇게 어떻게든 그 시간을 버텨내고 나면 내일은 또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안다. 또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질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불안해진다.
분명히 혼자 충분히 잘 살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가끔 아무 쓸데없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게 무슨 저주란 말인가?
조합이 문제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이미 엄청나게 바뀌었는데 우리 안의 본능은 여전히 동굴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최신식 컴퓨터에 도스가 깔려 있는 상태이고, 인터넷 소설을 한자를 섞은 세로글씨에 궁서체로 쓰고 있는 상태이고, 멋지게 인테리어 된 커피 가게에서 한여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뜨끈뜨끈한 국밥을 팔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우리 안의 본능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 그 이상한 조합이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본능이 문제다.
그런데 본능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우리는 동굴에서 불을 피우며 살던 시대, 그러니까 구석기시대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그 시기를 몇 백만 년 전쯤으로 알고 있지만, 겨우 만년 전 일이다. 인류가 이집트에 피라미드를 지을 때 다른 지역엔 맘모스가 살고 있었다.
만 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인류는 모닥불에서 인공태양을 만들어 내는 수준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러니 우리의 본능이 그런 미친듯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해서 본능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들은 오직 기우만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말로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다. 물리적으로도 필요하지만 특히 정신적으로 필요할 때는 그냥 도와줄 사람이 아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 생긴 나쁜 일이 그 사람에게 크게 손해로 이어질 수 있는, 평소에 나에게 많은 것을 저금해 놓은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 엄청난 투자를 해 놓은 그 사람은 나만큼이나 나를 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그럴 능력이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 사람의 눈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정말로 ‘살고 싶다고’ 느끼게 된다.
사고를 당해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 내 체중을 책임지고 있는 두 팔은 끊어질 듯 아프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포기하고 그 손을 놓게 될까? 아마도 혼자라면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즉시 놓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이들의 절박한 희망이 함께 한다면 살아날 희망이 사라진 그 절망의 순간조차도 나는 버텨낼 것이다.
혼자 사는 삶은 내 체중만 버텨내면 된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삶은 내 삶의 무게를 버텨내야 한다.
좋은 날들이 계속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운 나쁘게 힘든 날들이 반복될 때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은 바로 내 의지가 아닌 ‘나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이다. 평소에 우리는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행복의 관점에서만 유효한 말이다. 우리는 ‘너를 위할 때’ 유일하게 삶의 버거운 무게를 버텨낼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딱히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딱 한 명만 있으면 된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상관없이 그 조합이 어떻든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삶을 걸어갈 수 있으면 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 젊어서 배우자를 잃은 남은 한쪽을 살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들의 아이이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는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찾아다녀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처음부터 찾을 마음조차 없다.
설령 지금 이 순간 ‘혼자서도 충분한데?’라고 느꼈다고 해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로 내가 혼자 살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끝없이 SNS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그것은 결코 혼자 떠난 여행이 아니다.
삶에서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연락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떠오른다면 그것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저 혼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상처들로 인해 굳게 닫아 둔 문을 적어도 빗장이라도 풀어 두어야 한다. 당장 활짝 열어젖히는 것은 힘들겠지만, 누구라도 열 수 있게끔 정도만 열어 둔다면 어쩔 수 없이 잡상인들도 많이 들어오겠지만, 언젠가 누군가 실수로라도 그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렇게 실수로 들어온 사람 때문에 내가 절벽에서 매달려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면서 구조대와 함께 뛰어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과 나는 부둥켜안고 펑펑 울겠지만, 그 순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안고 울고 있는 이 사람이 우리가 오래전 들판에서 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던 그 사람임을, 그리고 내가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고 있던 그 사람임을 오래전 기억 속에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나를 안아 준 이가 내가 전혀 모르는 구조대원이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 모두 안엔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만큼의 함께 한 세월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게 쌓여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단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우린 늘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