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있었니?”
“뛰다가 넘어졌어요.”
“선생님에게 말해줄 수 없겠니?”
“정말 뛰다가 발이 걸렸어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선생님은 내 몸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물에 젖은 수건으로 상처 난 곳을 닦아냈다. 이어서 소독약을 바르고 그 위에 연고를 덧 발랐다. 그리고 한번 더 이유에 대해 물으셨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대충 펼치고 벽을 바라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것은 아주 어둑한 검은색이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오늘 일을 뒤 돌아보았다. 문득 나의 감정들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저씨의 배신감이 더 크기에 부끄러운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이 감기면서 어둠과 조금 더 밝은 어둠이 교차하다 나는 잠에 들었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에 눈이 떠졌다. 다들 자고 있는 시간에 부은 눈두덩이 아래에 선명하게 떠진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근육들은 나를 익숙한 행동으로 이끌었다. 이부자리를 털어 반듯하게 개고 각에 맞춰서 장롱에 넣어둔다. 찬물로 얼굴을 연거푸 씻어낸다. 아주 차가운 물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횟수로 얼굴을 씻어낸다. 그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오늘은 약간의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나는 몸을 곧게 치켜세우고 문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엉켜 있던 실 들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것 같다. 아침에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것이 도움이 된 것일까. 생각이 또렷해지고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던 중 몸에서 약간의 흙이 떨어진다. 아마도 어제의 잔해이지 싶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가 큰 철문을 밀고 밖으로 향한다. 확실한 발걸음이었다. 성큼성큼 힘이 실려 있는 걸음걸이. 보폭은 적당하고 일정하다. 구멍가게 앞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짐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아저씨.”
“어… 그래 이 시간에 어떻게 나왔니?”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저요 아저씨가 미운 건 확실해요. 어제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많이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요. 미운 마음보다는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
“아저씨. 저랑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물론이지.”
“봄이 오면 어디든 식당에 가서 일을 배울 거예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성인이 되면 아저씨를 만나러 가서…”
“…”
“… 아저씨를 만나러 가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릴 게요.”
“… 고맙다. 꼭 먹고 싶구나 네가 만들어 준 음식.”
“그리고 나중에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눌 수 있는 식당을 할거 에요. 그러면 가족분들이랑 함께 먹으러 와주세요.”
“약속하마.”
“네. 감사합니다. 이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고맙다. 고맙다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아저씨. 감사했습니다.”
“그래 건강히 잘 지내라. 칼은 항상 조심하고 사람들이 모질게 구는 것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조심히 가시고 건강하세요.”
나는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쳤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저씨에게 건넨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봄이 오면. 봄바람이 불어오고 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면. 하늘이 파랗고 따스한 햇살이 나를 내리쬐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몸을 움직일 것이다. 문득 돌아가는 길에 거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리 위는 온통 봄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워낙 주위를 들여다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새로이 눈에 띄는 것들이 많았다.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높아진 것은 확실했다. 길가에 작은 잡초들도 머리를 내밀고 있다. 회색 빛 같아 보이던 풍경은 아주 미약한 채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짧은 지난날의 변화가 다시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아주 단단한 보물상자 하나 만들고 그 안에 아름다운 추억을 잘 간직한다. 그리고 훗날 아저씨를 만나는 날 상자를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꺼내어 회상하리. 나를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길 바란다. 생각의 끝에 고아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문 앞에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듯했다. 나를 위해 나온 것 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