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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24. 2021

무한에 관하여(1부)

part 2. 철학의 시작(2)

<고대에서 근대의 철학>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고대에서 근대의 철학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에 언급한 것은 내 사고의 흐름이고 내 입장에서는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현대 과학지식이 이미 많았다. 그러나 고대나 근대의 사람들은 과학지식 없이 좁은 시선으로 철학을 헤쳐나가기 때문에 내 사고의 흐름과 역순인 부분이 많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즉 지동설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관찰을 통한, 즉 경험을 통한 사실이 지식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감각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체험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각을 초월하여 과학적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

 실제 이런 역순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앞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헤쳐나가야 하는 길이 이 지식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가진 시각의 한계를 이입하고 이를 벗어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창의적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 

  

1. 경험을 중시한 경험론

 고대에는 과학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 현대와 비교했을 때 조금은 황당한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신이라는 고차원의 존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반복적인 패턴을 분석하고 경험을 통해 관찰하여 인과관계를 밝히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계몽주의에 큰 힘을 발휘했다. 뉴턴에 의해 물리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인간이 하는 경험, 관찰로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했다.


2. 이성을 중시한 합리론

 인간은 언제부터 이성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을까? 실제 고대의 그리스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논리가 탄생하기 이전에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괴변이 넘쳐났다. 그러나 그 논리를 반박할 기준이 없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판단하는 판단의 기저를 파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시는 삼단논법과 배증률이다. 만약 지금 복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럼 그 복권은 어떤 특성을 지닐까? 당첨복권이거나 당첨복권이 아닐 것이다. 당첨되거나, 당첨되지 않는 상황 말고 다른 상황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당연한 특성을 배증률이라 한다. 

 보통 이런 당연한 생각이 문장이 매우 복잡해질 경우 논점이 흐려진다. 논점이 흐려질 경우 이런 논리의 기저를 이루는 특성을 이용해 문장을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을 밝혔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 중에 옳다고 여기는 어떤 기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한없이 의심을 거듭한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저들이다. 이러한 기저와 의식이 이러한 기저를 이용해 세상을 이해하는 정신적인 능력을 ‘이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고대 수학, 철학자 피타고라스를 거쳐 근대의 뉴턴, 라이프니츠와 같은 수학자에 의해 인간은 직접 검증하지 않고도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무언가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합당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인식을 이성(의식의 기저가 되는 무언가)이라고 보았다. 이 이성의 존재는 인간의 도덕성, 세상을 이루는 규율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이를 신이나, 실체와 같은 형이상학 논제에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나아가 변화하는 경험들이 아닌, 언제나 합당한 이성을 통해 본질을 파악하고,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3. 칸트 1: 선험적 종합판단

 1) 용어 정리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경우 용어가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다. 그렇기에 먼저 중요한 용어 몇 가지만 정리하고 넘어가자.

 선험적 명제: 경험하기 이전에 인간이 알고 있는 명제. 1+1=2, 두 점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등등. 

 경험적 명제: 인간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명제. 사과는 빨갛다. 얼음은 차갑다. 등등.

 분석 판단: ‘총각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다.’와 같이 ‘p는 q이다.’와 같은 조건의 형식에서 q가 p 안에 자동으로 포함되는 명제를 판단하는 것. 이는 지식이 확장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는 선험적인 판단이다.

 종합판단: ‘p는 q이다.’와 같은 조건의 형식에서 q가 p 안에 포함되지 않는 명제를 판단하는 것. 책상이 둥글다. 등등. 이는 지식으로 확장된다.     

 2) 칸트 이전의 경우

  칸트 이전에는 이 이성을 두고 학파가 나누어졌다. 누군가는 이 이성이 경험과 무관하며. 이성이야말로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지식을 옹호했다. 이는 선험적인 명제는 전부 분석 판단으로 이루어지고(수학, 기하학 등), 경험적인 명제는 종합판단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물리학). 이 흐름대로 이해하면, 수학, 기하학은 지식이 확장되지 않으며, 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우연히 참이 된 명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학, 기하학, 물리학은 이와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생각했다.


4. 칸트 2: 의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단순히 경험만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까? 만약 이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외부에서 얻은 관찰이나 경험에서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걸까? 이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무언가를 옳다고 여기는 것은 연역적 뇌의 무의식적 처리에 의해 의식을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1+1=2라는 명제를 판단할 때는 그 이유를 떠올리기 쉽지 않고, 그냥 참이라고 이해한다. 이를 다시 의식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 사람들이 수학과 기하학을 단순히 분석 판단(술어가 단순히 주어를 반복하는 구조)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19에서 20세기에는 1+1=2가 되는 것을 증명해 낸다. 이는 공리계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므로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그럼 이성이 세계를 이루는 진리일까? 정말 이성은 경험과 무관할까?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실제 경험이 존재할 때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외부 경험이 배제된 인간이 자의식이라는 고차원의 정신활동을 할 수 없다. 정신활동이 가능한 고도의 뇌를 가지기 위해 여러 감각을 통해 뇌가 발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뇌 활동과 신체 활동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은 고찰을 데이비드 흄이라는 경험론자가 고찰했다. 그는 관념은 감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인과론이 실은 감각을 통해 획득한 여러 경험을 습관적으로 옳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즉, 이 습관에 의해 인과론은 귀납적으로 확립된 개연성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현대로 따지면 경험이 누적되어 뇌가 무의식적 연역을 진행해버린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경험론과 합리론을 합치려 노력한 사람이 바로 이마누엘 칸트다. 이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경험론과 합리론을 합친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에 유명한 내용, 바로 ‘의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인식 주체가 외부의 대상에게 감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인식구조가 대상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한 대상이 실제 외부세계의 실체(칸트는 이를 물자체라고 칭한다.)인지 알 수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식구조에서 명제를 판단하기 때문에 인식구조 밖의 상황에 대한 서술이 불가능한 것이다. 

 조금 직관적으로 비유해보면,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가정하자. 태어날 때부터 시각이 없는 사람은 색상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빨간색은 대체 어떤 색일까? 빨간색을 알 수 있을까? 빨간색이라는 관념을 알고 있는 당신이 눈을 감고 빨간색을 상상하는 것과 애초에 맹인이어서 단 한 번도 빨간색을 보지 못한 사람이 빨간색을 떠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색상을 결정하는 인식구조를 가진 당신이(마치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 색상에 대한 인식구조가 없는 사람(물자체가 아닌 인식구조 안의 대상을 관찰하는 인간)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제 경험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감각을 통해 경험한 것이 외부세계의 실체와 같은가.’라는 질문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인식체계가 구성한 대로 감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체는 수박인데 우리는 그것을 바나나로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인식체계에서 구성한 대상이 바나나이고 구성한 바나나를 다시 수박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인식은 참일 수밖에 없다. 참으로 설정된 것을 보고 참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는 셈이니까.

 우리는 흔히 바나나가 노랗다는 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해, 바나나라는 대상은 외부세계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으며, 우리는 그 객관적인 실체를 감각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 이전의 경험론자들도 그랬다. 그러나 이 사고를 전환해 버렸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바나나라는 대상을 구성하고, 구성한 대상을 우리가 감각을 통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바나나의 실체가 노랗고, 기다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구성한 대상에서의 바나나가 노랗고 긴 것이다. 외부의 대상을 아무리 관찰하더라도, 이를 객관적인 실체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구성한 대상에 한정된 채 외부와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체계 안에 구성된 세계를 다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5. 칸트 3: 선험적 종합 명제와 이성

 이로써 대상이 아닌 인식 주체를 이해해 인식 주체가 대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인식 주체의 인식체계가 어떤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의식의 기저를 찾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칸트 역시, 경험하는, 인식체계 안의 인식 대상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분석해 인간이 어떻게 인식 대상을 구성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유추하고자 하였다. (감성, 지성, 이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자세한 내용은 저서를 읽어보길 권한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그는 합리론에서 언급하는 이성이 형이상학에서의 실체나 신이라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닌, 경험에서 지식을 확장해 가는 선험적인 종합 명제라고 보았다. 물리학의 시간, 공간, 수학과 기하학의 일부가 이 이성이라고 보았다.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성을 파악하려 했을까? 과거에는 이 이성에 대한 접근이 명확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순서에서는 외부 감각을 인식하는 의식의 기저가 이성이라는 것을 언급했지만, 이를 최초로 접근한 사람이 바로 칸트인 셈이다. 이 기저에 대한 메타적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험론과 합리론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칸트에 의해 비로소 두 개가 합쳐진 것이다.

 당시 시대에는 시각이라는 감각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다. 시각의 작동원리나, 뇌의 신경학적 분석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여러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기 이전의 시대다. 칸트는 오직, 당시의 과학지식과 논리만으로 철학에 접근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매우 유용한 철학적 접근이라 평가받을 만큼 놀라운 내용이다.

 그럼 이 이성 너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칸트는 경험에 선험 하는 이성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될 뿐, 경험 너머의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실제 수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 유명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다. 이는 후에 기술하겠다. (물론 이러한 이성의 한계가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성은 어디선가 선험 해야 함으로  누군가에게 부여받아야 하는데, 이 누군가가 신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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