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 톨스토이, <<안나카레니나>> -
제게 한때 가족은 끊어내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일도, 요란스러운 갈등도 없었지만 그냥 저는 가족이 싫었습니다.
불편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했고, 강요받는 맏이다움에 지쳤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때는 정확한 이유는 잘 몰랐습니다. 그저 이유없는 반항 정도로만 치부했고,
사춘기가 이십대 중반에서야 찾아온건가 싶어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희 가족과 제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삼형제의 맏이로 듬뿍 사랑을 받았고, 맏이로서의 의무보다는 이것도 해준다, 저것도 해준다 하는 약속을 제법 들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입시 날, 아버지는 저와 함께 시험장으로 걸어가면서 대학 입학 후 저와 동생이 머물 작은 아파트를 사주고 원한다면 유학도 보내주신다 하셨죠. 그땐 나도 내 꿈이 뭔지 잘 모르겠다며 꼭 그렇게 해주지 않으셔도 된다 속으로 생각할 정도로 순응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욕심이 없는 순둥이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차차 제 꿈을 펼칠 생각을 전혀 안해본건 아닌데다 그 말이 여태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말이죠.
하지만 아버지 일은 곧 망했고, 저는 아파트는 커녕 친구집이나 하숙집을 돌아다녀야 했고
밀린 월세를 집주인 아들 과외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도 마련해야 했고요.
쌀 살 돈이 없어 시장에서 순대를 천오백 원어치 사다가 하루종일 허기를 달리기도 했고요.
- 그때 순대 정말 맛있었고 양도 푸짐했었는데 말입니다 -
한두 해 만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수년간 축적된 결과물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고
아버지가 딸에게 공수표를 날렸던 이유가 자식이 시험을 잘 보길 바라는 희망에 더해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맏이인 저에게 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일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사채까지 썼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저는 스물 셋이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다 절망하며 결국 부모님만 원망했던 그런 자식이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 앞에 놓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세상 잘난 척은 다 하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명 진상이 되어갔습니다.
술마시고 울면서 내 얘기 좀 들어보라며 땡깡을 부렸죠.
왜 나를 이렇게 나약하게 키웠냐며 또 부모님을 원망하는 형국에 이르렀으니, 한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할 수 있는게 뭔지 인생 꿈을 찾아 뭔가를 해야할 때인데, 꿈을 찾기도 전에 좌절된 것만 같았습니다. 맏이로서의 책무를 이행할 능력은 안되는데 잔뜩 짐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나날이 예민해졌지요. 방황과 회피 속 연년생 두 명의 동생들과도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 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량한 자기 체면에 걸려 명절에도 거의 가지 않은 채, 일만 죽도록 해댔지요. 방황은 끝냈을 지 몰라도 회피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겁니다.
어머니가 이번에도 못 오냐고 물어올 때, 전화에다 대고 짜증섞인 말투로 왜 그리 당연한 질문을 하냐고 얼마나 무안하게 쏘아 부쳤던지. 솔직히 며칠은 쉴 수 있었으면서도 절대로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에는 안 내려갔던 건데요. 의기소침하게 계신 부모님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부모님이, 또 아무런 해결능력이 없는 무능이, 서운하고 화가 나고, 그저 죄다 불편하고 싫었던 것 뿐인데 저는 그럴싸하게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그를 알아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한심스러워 했던 겁니다.
참, 딱한 청춘이었죠.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아이들이 커가면서 친구들에게는 시시콜콜 고민을 털어놓으면서도 부모님에게는 절대 말을 하지 않잖아요. 비단 아이들뿐만은 아니겠죠. 가족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족같다는 어른도 제 주변에는 제법 있습니다.
가족에게 말하면 쏟아질 과한 걱정,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비정한 말들이 불을 보듯 뻔하니깐 피하는 거겠지만, 또 나를 둘러싼 이래야 한다는 강요도 회피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까지 된 것에 대한 씁쓸한 감정만은 어쩔 수 없더군요.
누구에게 귀책사유가 있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사는 대부분 상호작용이라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이 무의미한 일이기도 합니다.
친구는 내 입장이 되어 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객관적으로 나도 모르는 나를 짚어주거나 난국을 타개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가족은 일단 호들갑부터 떨며 불안해하거나 냉정을 찾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치닫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잊어도 되는 지나간 괴상망측한 기억도 오래오래 기억하면서 자꾸 곱씹는 것도 불편하기 그지없게 만듭니다.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일이 그 가족 안에서는 큰일로 발전되는 기폭제가 되는 데도, 우리는 멈추지 못합니다.
가족간에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남처럼 잊어 주는 것도 필요하지요.
과하지 않은 무관심과 과하지 않은 애정 말입니다.
제가 한때 가족으로부터 떨어지려 그토록 스스로를 괴롭힌 것도,
부모님이 제게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도,
죄다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밑바닥에 굳건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1년 365일 같은 공간에 머문다는 이유로, 부모나 형제라는 이유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나들며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봅니다.
한때 가족에 대한 불편함, 원망 따위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고 할 순 없겠지만
저는 지금 노력중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며 말이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서로에게 물 흐르듯 다가가려면, 그래야 한다고 다독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