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살고 있습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정호승 시인의 '아버지의 나이' 중 -
"내가 가장 후회하는 건 너를 대학 보낸 거다." 대학 2학년 어느 날, 당장 집으로 내려오라는 불호령에 영문도 모른 채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내려왔건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를 관두라는 말씀이라면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말씀이신가 당황했습니다.
저를 보시곤 어디선가 데모하는 사진을 갖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2학년이었고, 확고한 신념으로 유명세를 타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석진 곳에 있다가 쭈뼛거리며 맴도는 저를요? 뭔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뭘 하고 돌아다니냐며 그렇게 네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거면 부모 자식 인연을 끊자고 속사포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척 화가 나 있으셨죠.
아버지는 저희가 태어날 때부터 엄격 그 자체셨습니다. 줄 세워 아침 출근 길마다 인사를 했고, 퇴근하시면 현관문까지 달려 나가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식사할 때는 조용히 했고, 조르륵 앉아 아버지의 예의범절 교육도 들었습니다.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윗사람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의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아버지는 제가 몇 번 데모에 나간 걸 사회에 대한 예의 없음으로 여기셨던 걸까요.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일에 휘둘려 본분을 망각했다 여기셨던 걸까요. 아버지가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 얘기는 듣지 않고 답을 정해놓으신 걸 보면서, 그저 세상의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사람으로만 느껴졌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 연을 끊자는 말씀을 하셨을 때 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걸까 하는 서운함으로 시작해 실망감, 서러움 등 매우 복합적인 감정들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세상을 보는 시각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는데 마치 당신의 방식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에 반항심도 생겼습니다. 고집도 세고 자기주장도 강한 편인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을 해버렸죠.
어머니는 제가 안 저러더니 대학 가서 이상하게 변했다며 소리치셨습니다.
그때부터 심리적인 거리가 저와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아버지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보시면 답을 했지만 그마저도 형식적이거나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도 많은 질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점점 아버지와 식사 자리도 줄었고, 대화도 사라질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갈라진 땅에 내리는 비였지만 당시는 청천벽력이었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었습니다. 아직 실망감, 서러움 따위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 이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왜 모르셨나 하는 원망의 마음이 더해졌죠. 아직 어린, 경영에 '경'자는커녕 'ㄱ'자도, 아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다 싶지만 그때 그 감정은 저와 아버지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힘겨워하는 모습에 어머니가 흔들렸고, 이러다가는 온 가족이 불행의 늪에 빠질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저라도 중심을 잡아야만 했지만 당시 전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고 제 내면은 단단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강하게 헤쳐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어야 했는데 그 심리적 중압감은 저를 방황과 불안으로 몰아놓았습니다. 술을 엄청 마셔댔죠.
어머니는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지 못한 저를 위해 한동안 돈을 보내주셨는데 형편이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지 몰랐던 저는 몇 번 돈을 보내달라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취직 공부한답시고 내민 손이었지만 사실 술을 마시느라 돈을 빨리 탕진해 버렸습니다. 한날은 어머니께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이제 제발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시며.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이 망했을 때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직접 뭔가를 설명하지 않으셨네요.
근엄한 모습으로 존중받길 원하셨죠. 저는 그 모습에 또 화가 났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못 하시는지, 자식들 볼 면목이 없어 조용히 지내시면서도 근엄함은 왜 여전히 풀지 않으시는지. 한 번이라도 나 힘들다, 너희들이 잘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시는지.
그때는 아버지가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식들이 무시할까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시는 거라 여겼습니다. 실망, 서러움, 원망의 감정에 분노가 더해지니 아버지와의 거리는 더 멀어져만 갔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5년입니다.
오랜 투병생활 덕분에 저와 아버지 사이는 더 이상 벌어질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좁혀지지도 않은 채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결혼하겠다며 신랑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간 날, 아버지는 야윈 몸에 곱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오셨습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하시다 사교성 좋은 남편이 이런저런 유머러스한 얘기를 건네자 환하게 웃으시며 마음에 들어 하셨죠. 자리를 정리할 때쯤 이런 말씀을 예비 사위에게 건네셨습니다.
"우리 딸은 똑똑한 아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일을 할 친구다. 난 못난 아비라 앞길을 잘 터주지 못했지만 자네가 잘할 수 있게 곁에서 잘 도와줘라."
서먹했던 저와 아버지 사이에 그 말이 스며들자 제 가슴이 먹먹해왔습니다. 저한테 하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뭐라도 표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고 예비 사위가 "저도 너무 능력 있는 친구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걱정 없으시도록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딸을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말해주는데 그게 그저 고맙더라고요.
그 뒤로도 저는 아버지께 제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저는 말 대신 그저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드리거나, 곁에서 함께 있어드리는 것 말고는 해 드린 게 없습니다. 아버지 역시도 두어 마디 정도 하셨는데 건강은 이상 없냐? 일은 괜찮냐? 정도였습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일은 재밌게 합니다라고 단답형으로 답했죠.
아버지와 제 사이에는 작은 오솔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함께 걷다가 때로는 제가 먼저 오솔길 위로 올라갔을 수도, 아버지가 먼저 오솔길 위로 올라가셨을 수도 있지만 둘 다 동시에 그 위로 올라 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저기 앞서 걷기도 하셨고 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걸어간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가던 걸음 멈추시고 저를 바라보셨겠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또 때론 뒤돌아선 저를 기다려주셨을 겁니다. 제게 뭔가 얘기하고 싶은 표정으로. 저는 그 표정을 보면서도 애써 못 본척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해 여전히 먹먹한 가슴을 살아가지만, 아버지가 제게 뭔가 하고 싶으셨던 그 말씀 나중에 만나면 꼭 들려주세요. 그때까지 열심히 잘 살다 가겠습니다. 라는 다짐으로 오늘 하루도 지냅니다.
"다시 만나요. 그때는 우리 함께 오솔길을 걸어요." 라는 아버지와 나 사이를 더 멀어지지 않게 붙드는 주문을 외우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