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1년 365일 한결같은 헤어 스타일. 결국 사지 않을 거면서 묻고 또 묻고 정말 창피하게.. 안 들어오면 말지 왜 잠도 못 자고 저러지? 나는 저렇게는 절대 살지 않을 거야."
엄마를 엄마로 바라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같이 살던 엄마와 떨어져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생겼어도 안 그랬는데, 최근 엄마를 한 사람으로, 한 여자로 보게 됐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 그저 나이가 먹어가면서 예전엔 엄마는 왜 저럴까 했던 의문들이 지금은 그런가 보다 하는 수용의 마음으로 바뀌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엄마는 이땅의 모든 엄마들처럼 당신의 책무를 아이를 잘 키우고 집안살림 잘하고 남편을 위해 뜨뜻한 밥과 국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잠깐 직장생활을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그만뒀지요. 당시 여자들은 결혼하면 대부분 다니던 직상을 관뒀으니깐 엄마도 직장을 그만둔 것을 당연하다 여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불쑥 직장을 그만둔 게 후회된다고 하시더군요. 엄마가? 아니, 왜?
만약 그때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승진도 하고, 월급도 꽤 받고, 후배들도 제법 많이 생겼을 텐데. 게다가 지금처럼 재취업할 때에도 좀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겠니라고 하십니다. 엄마는 다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십 대 중반쯤부터 일을 하셨으니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네요. 물론 결혼 전처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직이 아닌 몸을 쓰는 일을 하시죠.
그렇게 해서 시작된 대화는 어느덧 엄마의 결혼 이야기, 결혼 후 우리를 키울 때 이야기로 번져갔습니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처음 사귄 남자와 결혼해 연애경험도 없었다면서, 후회는 없지만 참 재미없는 청춘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결혼하자마자 시댁에 들어가 살았는데 첫째가 딸로 태어나자 할머니는 실망하셨다고 합니다. 큰아버지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음에도 할머니는 첫째는 무조건 아들이어야 한다는 분인지라 예쁘다는 말은 커녕 밤에 제가 울기라도 하면 잠자는 사람들 다 깨운다며 호통을 치셨다고 해요. 해서 엄마는 저를 업고 동네 어귀를 도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분가를 하고 난 후 둘째, 셋째가 연년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는 아이 달래고 살림하고 부산한 이십 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느무느무 정신이 없었다고요. 저를 낳은 게 스물두 살 즈음이었으니, 아직 스물여섯밖에 안 된, 어린 엄마였죠. 스물여섯 살이면... 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는데.
다행히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꺼야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막가파 딸은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속 깊은 곳 자리한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인지 엄마는 종종 넌 엄마처럼 살지 마라고 하셨어요. 네가 하고 싶은 일부터 찾으라고. 그때는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종종 그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저의 일기장에는 엄마에 대한 연민이 보입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와 몸빼 바지, 그리고 누구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늦은 밤까지 안 자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엄마. 저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대충 비슷하게 됐습니다만, 어려서는 그 모습이 너무 구차하고 식상해 보였습니다. 스스로에게는 무관심하고 상대에게만 일방적으로 관심을 쏟는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자기 애정이 없는 사람이 주는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과는 다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다 제가 학교에서 귀가하는 줄도 모르고 이웃집에서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면, 그게 유일한 엄마의 노는 시간일 수도 있는데 저는 몹시 짜증을 냈고 엄마는 그러면 '엄마도 자기 시간을 가지라매.' 하며 제 이중성을 바로 지적을 하셨죠.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거니라는 표정으로.
엄마는 꾸미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지도 않았습니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사고 싶은 옷이나 신발 등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샀고 늘 자신보다는 자식들이나 남편을 먼저 생각했죠.
제 취향과는 상관없이 엄마가 입고 싶은 스타일의 옷을 입히면서 아이고 예쁘다 하며 환하게 웃었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건 구체성은 결여된 막연한 다짐이었습니다.
한 가지, 성인이 된 후 일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집념만큼은 꽤 오랜 시간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잠재의식 속에서 커나갔던 것 같아요. 하여간 엄마처럼 되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오면 괜찮아진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꾸역꾸역 오십 중반을 맞이하며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었는 건 아마도 엄마의 덕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 엄마는 사십 대 초반이었습니다. 전 사십에 아이를 낳았는데, 엄마는 대학을 보냈더라고요. 지금 제 나이대인 오십 대의 엄마는 집에 발걸음 뚝 끊은 딸을 그리워했겠지요. 수술을 받은 남편의 기력이 나날이 약해져 우울했을 테고, 직업전선으로 뛰어든 후 힘듦을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빚 독촉에 시달렸고 생활비가 없어 제게 몇 백만 원만 대출을 부탁했는데, 그때 제가 엄마에게 일을 하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왜 기억이 가물가물할까요. 저두 집에 빚을 갚아줄 만큼 넉넉히 돈을 벌지 못해 속상한 마음에 한 소리였겠지만 엄마는 섭섭함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런 딸에게 힘들다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얼마 전 목돈을 주시며 제게 빌린 돈을 이제야 갚는다라고 하실 때, 부채감을 안겨드린 딸이라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웠고 힘겨운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셨을지 싶어 먹먹해졌습니다.
아마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엄마를 엄마로, 그냥 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저와 동일시하면서 겪게 된 일종의 자기부정 같은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면 절대 저렇게 안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거울 같은 거죠.
엄마는 여전히 저를 자기 분신처럼 생각해 불필요한 잔소리를 하고, 또 저는 금세 그러지 마라고 짜증을 내면서 티격태격하지만,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러려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엄마를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엄마가 아니라 그저 엄마인 엄마로 말입니다. 그렇게 엄마와 거리를 두면서, 전 엄마를 진짜 더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오래 사세요. 제가 엄마와 거리두기를 완벽하게 끝낼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