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사람들은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지. 아마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쏟는 것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족과 싸우는 걸 거야." -데이비드 아셀
막냇동생은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예민해지고 다소 거친 삶을 살아왔다는 걸 알았지만, 본성은 착하고 가족을 사랑한다는 걸 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나, 형에 대한 불만은 사춘기 때부터 이미 누적되었던 걸까요.
그런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해 왔던 걸까요.
동강 난 시간을 입증이라도 하듯 막내는 초지일관 싸늘하며 냉소적으로 쏘아붙이듯 반응했고, 제 결혼을 앞두고 온 가족이 축하 파티를 하던 자리는 장남의 손이 막내의 얼굴로 날아가 박히는 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이 어려워지고 저는 저대로, 장남은 장남대로, 또 막내는 막내대로 각자도생 했습니다.
제가 대학 졸업 무렵부터 한 십여 년을 동생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취직을 했고 직장명이 뭐다 정도만 알지, 일상의 고민이나 힘겨움은 관심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저보다 네 살 어린 막냇동생은 제가 방황과 회피를 시작했던 대학교 4학년 때 대학 입학했고, 그때는 이미 우리 집은 망했던 상황이라 동생은 바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결혼하게 된 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조용하던 동생은 느닷없이 "그래도 니들은 대학이라도 다녀봤지. 나는 가자마자 휴학하고, 등록금 없어서..."라는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뭔 소리야? 그리고 니들이라니?!(장남)"
"됐다. 니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막내는 갑자기 일어났고, 그러면서 상을 치고 젓가락이며 술잔을 내동댕이치는 행위를 했죠.
그래서 장남이 더 화가 난 것 같습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주먹이 날아가더군요.
저는 말리고 장남은 막내 멱살을 잡고 옷이 찢어져라 흔들어대며 한 손 손바닥으로 머리며 얼굴을 때리고... 떨어지지 않는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 마냥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들 못해.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라고 엄마가 괴성을 지르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요? 아버지는 그 사이 수술을 두어 차례 받고 쇠약해진 몸으로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다가 엄마의 괴성 이후에 거실로 나와 저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이게 다 무능해진 가장의 탓인 양 아무 말 없이요.
그날 일에 대해 지금까지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잊고 싶은 기억이니깐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인데 흐릿해져 가면서도 그때 느꼈던 감정만은 여전히 콕콕 찌르며 살아나곤 합니다.
막내는 공부는 못했지만 늘 주변에 친구가 많고 명랑하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옷을 좋아해 아침, 저녁 옷을 갈아입곤 했죠. 사고 싶은 걸 죄다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가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쪼들리지는 않았기에 동생은 그런 자신의 일상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막내는 경쟁심도 많았습니다. 공부는 형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아요. 싸움에서는 자신이 우위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건지 별거 아닌 일로 형과 어려서부터 엄청 싸웠죠.
그러다 형과 누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에 어쩌면 콤플렉스를 가졌을 수도요.
그때 누구 하나 곁에서 괜찮아,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준 이는 없고, 오히려 너 어떻게 살래라고 했으니, 막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예민했고, 어머니는 대다수 어머님들처럼,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타령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인가, 한 번은 집에 내려갔는데 어머니가 막내의 책가방과 교과서 등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놀러만 다니고- 아마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친구들과 시내로 놀러나갔던 모양입니다- 학교 관두라고 했다고.
제가 말리면서 어찌어찌 수습은 되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자식의 인생에 객관적, 관망적 태도를 웬만해선 갖지 못하잖아요.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몇 날며칠을 화를 삭이지 못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요? 저라고 뭐 달랐을까요.
노는 것도 적당해야지. 대학 못 가면 원하는 직장 못 가고. 그럼 네가 사고 싶은 물건도 못 사.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겠죠. 어머니처럼 감정적이지 않았어도, 대동소이했을 겁니다.
그런 일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때론 외롭고 때론 우울해지고 때로는 화도 났다가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을 거고 막내 스무살 무렵부터 경제적인 형편도 힘들어졌으니 부모님은 더 예민하셨을 거고 잘난 척하는 형이나 누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해보는 느낌도 들었겠지요. 홀로 남겨두고 떠난 형이나 누나가 원망스러웠을 거고 형제가 무슨 소용있나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귀여움 받던 막내가 이제는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겠지요. 인생은 다 그런거겠지만서도. 하여간 그게 폭발한 거겠죠.
몇 년 전부터 저희 형제들은 많이 편해졌습니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서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그런 훈련을 했다고나 할까요.
가족 구성원 중에 막냇동생의 폭발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희 가족은 그렇게 생겨먹은걸요.
다만 내가 정해놓은 기준에 부합하지 아니한다고, 그 삶을 미달이라고 규정지어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기에 저희 가족은 일절 이래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좀 쿨한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고 하죠.
예전같으면 툴툴거리며 자존심 상해했겠지만 막내는 형의 권유대로 자격증 시험을 봤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저희 삼 형제 중에서 제일 오랫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요. 지금은 객지생활을 하지만, 자주 어머님께 연락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가장 잘 챙기고.
이처럼 가장 따뜻한 막내를 우리 가족이 망쳐놓았던 건 아닌지, 이제라도 돌아와줘서 고맙고 또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자주 못봐도 늘 응원하고 있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