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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05. 2024

동강 난 동생과의 시간

- 철부지 누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응축된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 고시 준비를 하던 동생과 대학 졸업반이었던 제가 잠깐 반지하에 산 적이 있습니다. 새벽 여섯 시 전에는 도서관을 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며 동생은 새벽 다섯 시 정도부터 십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 놓곤 했습니다. 자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귀가 어두웠고 잠엄청 많은 편이라 여섯 시에 학교에 가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죠.  


한 번은 동생이 내일은 꼭 여섯 시 전에 가야 한다며 제게 깨워달라 몇 번이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노라며.

하지만, 제가 눈을 뜬 시간은 여덟 시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동생은 잠을 자고 있었고, 저는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여덟 시가 넘었어. 빨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동생의 표정에는 절망을 넘어 슬픔이 비췄지만 저는 태연히 짧고도 건조하게 말했습니다. "미안"


아니 그 정도로 미안해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공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잠 관리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주 중요한 시험이라면 당연히 일어났어야지, 원래부터 글렀던 거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생을 깨워야 한다는 알면서도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잠을 들었던 거거든요. 고의성이 다분했습니다.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매몰차게 외면꼴이었으니깐요.


출처: 펙셀





당시 저희가 살던 반지하 방 보증금은 지금까지도 얼마인지 모릅니다.

다만 밀린 월세 대신 집주인 아들 과외를 해줘서 월세는 삼십만 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화장실에 작은 방 두 개가 있는 집이었는데, 옆에는 매일 밤 치고받고 싸우는 젊은 부부가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지만 부모님은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어 이리저리 빚을 내 버텼고, 저는 그저 아파트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꽤 오래 지키지 못하다는 것에 뭔가 사건이 발생했다고는 직감했지만 두려웠던 걸까요. 전 묻지 않았습니다. 보살핌이 필요한 동생은 제게 떠맡긴 것이었고 그게 늦은 밤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이어졌던 핑계가 됐던 겁니다.


동생을 위해 특별히 해준 것도 없으면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생겼다는 중압감을 벗어나고자 저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복수들을 했는데, 시험기간 중임을 알면서도 친구들을 우르르 불러 술을 마셨고, 웬만하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라 잔소리를 하기도 했고, 속옷 빨래는 네가 직접 손빨래하라고도 했죠.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행동들이지만, 저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집에 뭔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동생의 그 별거 아닌 깨워달라는 부탁까지 나 몰라라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생의 인생을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봤더라면 어땠을까요.

고시를 준비하는 동생을 조금 떨어져 바라봤더라면,  

친구가 공부한다고 하면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려면 못 마시게 하고,

공부하는데 체력관리하라며 박카스 한 병이라도 사주면서도 동생에겐 왜 그리 인색했던 건지...

그저 철이 없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동생과 저는 6개월도 안되어 고시원으로 또 다른 자취방으로 흩어졌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도 몇 년간 은 보지 못한 살았습니다. 보지 않았던 건지도요.

그렇게 우리 형제 사이 단절의 시간은 왔고, 저와 제 동생들과의 인생에서 그 몇 년은 동강 잘려나가 아무런 기억도 없이, 공유하는 추억도 하나 없이,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동생은 고시를 접고 취직을 했습니다.

가정형편이 고시공부를 뒷바라지할 형편이 전혀 안 됐거든요. 막내가 복학을 했고, 젊으신 부모님은 살아야 했으니깐요.

전 제 살 걱정에 사실 당시에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나 이런 마음은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앞서 쏟아놓은 미안한 마음은 세월이 흘러 철들자 느낀 참회 같은 거지요. ㅎ


헌데 이상하게 동생의 취직 소식을 듣자마자 그저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습니다.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데 아쉬워하며 당시 제 월급으로는 비교적 꽤 비싼 가죽가방을 골랐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은 평생 들고 다닐 거라고 특유의 반달눈고리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취직을 하고 안정을 되찾으며 다시 예전의 형제로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싸움을 하기 위해 긴 휴식을 가진 사람들 마냥,

저희는 폭풍우에 휘말리듯 사춘기 시절보다 싸움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동강 난 몇 년간 부모님은 간신히 몸을 누일 작은 집으로 옮겼는데

단 한 번도 동생들과 그 집에서 밥 한번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네요.

제가 거의 집엘 가질 않았고, 가더라도 하루 만에 올라오곤 했으니깐요.

동생들은 제가 변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눈으로 보지 못하면 모르는 거니깐요.


그래서 우리는 동강 난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오해의 시간을 해소하고자

처절한 몸부림의 시간을 갖게 됐던 걸까요? 아픈 손가락 막내가 드디어 폭발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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