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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Oct 12. 2023

최소한만

장기기억의 힘을 믿으며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네요. 가을바람이 제법 칼칼해지고 하늘이 성큼 높아졌습니다.

그리 녹음을 자랑하던 쌩쌩한 이파리들도 하나둘씩 가지에 힘겹게 매달리듯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제 나름 저의 하루를 열심히 이어나가며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지난 글들을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들의 양육 목표를 다시 재정비하며 모두 하향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좀 더 느리게, 좀 더 오래 기다려주며, 좀 더 천천히 가기로요.

처음에는 방향을 잡지 못해 한동안 헤매기도 했었는데요, 이제는 좀 어느 정도 마음이 굳혀지고, 새로운 에너지도 얻으며 힘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은 11살, 만 10세로 5세의 인지를 가지고 있는 자폐를 가진 발달장애아이입니다.

의학적으로 8~9살 인지로 발전하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은 적도 있지만, 사실 저는 그런 진단 따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러한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딛고 이겨낸 많은 성공사례를 떠올리며, 엄마로서 나름 핑크빛 꿈과 희망을 갖기도 했었더랬지요.

그러나.

제 꿈과 희망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시간과 상황들은 갈수록 아들에게 향하는 바깥세상의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저도 한계의 벽이 높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꿈에서 깨어 현실을 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현실은 앞으로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달아버려서 씁쓸하지만, 그래도 일찍 깨달은 만큼 눈을 똑바로 뜰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의 양육 목표는 더 이상 '독립'이 아닙니다.

어느 부모든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 최종 목표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겠지요.

아이가 '독립'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고, 사회적으로 걸맞은 인성을 기를 수 있게 가르치는 일, 그게 양육의 기본 소양이란 생각으로 아이들을 케어해 왔습니다.

물론, 첫째 아이의 양육목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첫째인 딸은 무난히 잘 따라주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아픈 손가락인 막내아들의 목표는 독립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세운 새로운 목표란, 오히려 "잘 도움받기"로 정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아들은 어쩌면 평생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다면 도움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삶이라니...

심지어 이런 삶이란, 가끔은 누군가의 주도에 의해 모든 의사가 결정되기도 하죠.

주체적일 수 없는 삶... 이런 방향이 과연 맞는 것인지 저도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새로운 교육관을 비판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필요한 방향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예 틀린 방향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것도 말이 쉽지,  '타인의 도움을 잘 받는다'는 것이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그리 당연하지 않듯, 특히 자폐성향이 있는 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불안해도 조금만 좌절해도 받아들이는 역치가 은 아들에게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스스로의 생활이 아닌 함께 하는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게 된다면 최소한의 규칙과 규율을 지킬 수 있어야 하죠.

어느 정도의 기본적은 자조적 생활 습관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도움받는 삶이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모든 일을 다해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무언가를 혼자 창조적으로 해낼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나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일...

사실은 제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이도 저도 지치지 않게, 최소한만 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지능력이 여전히 언제까지고 5~6세인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냐인데...

제가 믿고 있는 것은 "장기 기억의 힘"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이미지_ 게티이미지뱅크
기억은 크게 작업기억(Working memory), 단기기억(Short-term memory), 장기기억(Long-term memory)으로 나뉠 수 있으며, 이들 중 장기기억은 단기기억이 기억고정(Memory consolidation) 과정을 거쳐 우리의 뇌 안에 저장된 형태를 의미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기기억 [Long-term memory] (분자·세포생물학백과)


장기 기억은 대뇌피질에 저장되어 오래도록 보존되는 기억으로, 해마가 담당하며 매우 인상적인 경험이나 반복적인 자극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배운 것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거나, 스스로 개념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없다면, 몇 번이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아예 몸에 각인시키듯 기억을 뇌 안에 고정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오래 걸리는 효율성 없는 방법이죠.

알고 있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지치지 않고 묵묵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기억 상실 환자도 자전거 타는 방법은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처럼요.

아들에게는 '6'을 기억해 내는 게 힘들었나 봅니다. 몇 장을 몇 날 며칠 동안 쓰고 또 씁니다. 이제는 제법 잘 쓰게 되었습니다. 장기기억으로 기억이 고정됐으려나요...


요즘은 아이와 한글과 숫자를 꾸준히 매일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한글이나 숫자정도는 대충이라도 알고 있어야 길을 잃어도 도움을 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누가 물어보면 주소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안 통하면 쓸 수라도 있으면 좀 더 도움을 잘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근데 아들과 하는 학습시간이란 쉽지 않네요.

사실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은 감각도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아 주변 움직임이나 소리도 민감해서 집중시간도 짧습니다. 기억 장치의 오류로 어제 배운 내용을 금방 까먹거나, 알았던 기억들을 바로 산출해내지 못하거나 혹은 산출해 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반향어나 상동행동도 많은 편이라 주의가 산만합니다.

그럴 때는 하루에 10분도 해도 괜찮고, 5분만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삼시세끼 밥 먹듯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귀찮아도 밥 먹는 걸 거르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몸에 배어 각인되어 있을 테니까요.

해내야 할 목표분이 최소한이 된 만큼 아들과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우린 더 천천히 가기로 했잖아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작은 숫자하나가 쌓일 때까지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는 제법 엄마와 매일 하는 시간이 싫은 듯하면서도, 조금씩 적응됐는지 20분도 넘게 책상에 앉아 있어 준 적도 있습니다.


매일 한 장씩만 해도 오늘 공부 끝!


티끌 모아 태산이라죠.

전 태산까지 바라지도 않지만 지금의 작은 티끌이 먼 훗날, 아이와 저의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달리 특출 나지 않아도, 남들이 걷어차는 돌멩이 취급이 된다 해도 그늘 속에서 자신의 길에 서서 묵묵히 해내는 그런 길을 가고자 합니다.

힘내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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