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이들과 바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만큼은 한결 더여유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학이 참 좋아요.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겨울이어서조금은 들떠있기도 하고요.
겨울방학맞이로 이리저리 집을 정리하다 보이는 우리 집의 특별한 흔적들이 보여 글을 써봅니다.
저는 집을 좋아합니다.
전형적인 집순이랍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첫째가 두 살 때, 막내가 돌이 되기도 전 무렵에 이사 왔으니, 벌써 10년이넘게 살고 있는 저희 가족의 아늑한 보금자리입니다.
집은 누구에나 그렇겠지만 중요한 의미의 공간입니다.
전업주부인 저에게는 일터인 동시에, 에너지를 채우는 휴식공간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의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배움과 학습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남편에게는 일터에서 돌아와 쉴 수 있는 쉼터의 공간이기도 하죠.
집은 수많은 가족의 시간으로 더해져 저희 가족만의 역사와 추억이 쌓입니다.
저에게는 특히 여러 의미가 더해진 소중한 집이지요.
그래서인지 집을 사랑하는 만큼 공도 많이 들이는 편입니다.
계절마다 가구의 배치나 소품을 열심히 바꾸고, 수리하고, 덧대고, 치우고, 꾸미며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을 흠뻑 느끼려고 하는 편입니다.
집에서 쉬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가족들에게 쉼이 되어주는 공간.
그게 집에 대한 저의 로망이기도 해서 한 때는 더 열심히 아늑하게 꾸미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름 인테리어랍시고, 주렁주렁 매달고, 덕지덕지 붙이고, 치렁치렁 덧붙이며 오로지 나의 만족감을 누리는 저의 취미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집을 꾸미는 것은 저의 영역이자 취미생활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집 꾸미기에 열을 올린 이유는 이런 거창한 공식적 이유도 있지만 솔직히 내면 깊숙이 고백하자면, 한 때가 제가 아들을 키우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우울증이 심하게 왔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에게 저의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커서 꾸미기 시작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장애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모든 걸 다 바치고, 무신경하게 우중충하게 살고 있지 않다'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사실은 우울의 바닥 깊숙이 침체되어 있었으면서, 사실은 아이에게 모든 걸 다 걸며 전전긍긍하면서, 저의 어둠을 가리고자 더 기를 쓰며 열심히 꾸몄더랬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집 예쁘다고 해주는 칭찬들을 들으면, 으쓱해하며 번지르르하게 겉돌다 마는 가벼운 위로를 달게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애써 부리는 허세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집이 더 환해 보이게, 애들 키우는 집답지 않게, 하얀 가구나 하얀 벽지를 일부러 더 고르기도 했죠.
다행인지 아닌지 어릴 적 저희 집 아이들은 관심이 없는 건지, 제가 떠들썩하게 요란하게 주렁주렁, 덕지덕지, 요리조리 꾸며도 낙서를 하거나 물건을 헤집는 장난은 안쳐서 유지가 잘 되는 편이기도 했었습니다.네, 요때맘까지는 말이죠...
그리고 지금 현재,이런 번지르르한 집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힘 잔뜩 줘서 유난하게 열심히 꾸미던 옛날 인테리어들. (※지금은 절대 이렇지 않습니다.아니, 못합니다.)
그러다 작년 무렵부터 막내아들이 벽에다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낙서를 발견했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반갑고 기뻤습니다.
어떤 놀이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낙서도 어찌 보면 놀이니까요. 아들이 어떤 것이 되었든 흥미를 보였다는 게 저희 가족에게는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저는 내심 살짝 불안했지만 '이것도 좀 하다 시들하겠지' 싶었습니다. 어떤 장난감을 사주어도, 어떤 놀이를 소개해주어도 늘 그래왔으니까요.
아들이 오랫동안 즐겨하는 놀이라고는 손을 부채처럼 펼치고 흔드는 특정한 상동행동들 정도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낙서를 발견할 때마다 기특해서 웃으며 칭찬까지 해주었더랬습니다.
집안 구석구석 곳곳에 보이는 아들의 흔적. 각각 방 벽은 물론, 물건에, 심지어 바구니 안쪽이나 가구 뒤쪽까지 낙서 안 한 곳이 없을 정도로 낙서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제 예상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낙서는 늘어갔습니다. 점점 저도 거슬리기 시작했죠.
공들여 꾸며놓은 물건들이나 가구들에 아들의 낙서가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방 한 구석 정도에서 시작된 낙서는 그 영역이 점점 넓어져 갔습니다.
저도 나중에는 길길이 날뛰며 잔소리도 하고, 졸졸 따라다니며 보이는 족족 닦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아들과 저의 영역 싸움이 되어갔습니다.
마치 아들은 저의 영역을 모두 침략이라도 하겠다는 듯 공격적으로 낙서를 했고, 저는 제 영역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며 닦아 내기 바빴습니다.
창이냐, 방패냐의 수준이었죠.
아들은 각 방은 물론거실, 부엌, 베란다를 가리지 않았고, 가구나 소파, 눈에 띄는 어느 물건이든 끊임없이 낙서를 했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조용하다 싶으면 저는 불안해져 감시하러 쪼르르 달려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아들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했습니다.
나중에는 저의 감시를 피해 가구 뒤편이나 이불, 바구니 안쪽 같은 곳까지 낙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누나방 책상이나 벽지, 이불, 심지어 펼쳐놓은 숙제 노트도 예외가 아닙니다. 딸이 속상해하며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닦아냈습니다. 아들도 저에게 따발총 같은 잔소리와 함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치욕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닦아내야 했죠.
자기 전이라도 일단 낙서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를 쓰고 가족 총동원이 되어 걸레질하느라 자지도 못하고 진땀을 빼기도 했습니다.
아들은 마치 정복전쟁을 하듯 여기저기 낙서를 해댔습니다.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게 취미이자 로망인 제게는 제법 스트레스가 되고 말았죠. 침략당하는 것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요?
아무리 스케치북을 펼쳐줘도, 색칠공부책을 사다 줘도 아들은 다른 곳에 낙서를 했습니다.
길길이 날뛰며 열내는 엄마 모습이 보며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렇게 아들과 제가 대립각을 한참 세우던 주말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재에서 남편 컴퓨터와 책상, 키보드에도 낙서를 남긴 아들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남편은 찡그린 제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치를 보며,
"아들이 색칠해 놓은 색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놔뒀어. 봐봐, 예술품 같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눈에는 당연히 지워야 하는 청소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죠.
그저 '또 지우기 귀찮아서 저런 소리를 하나보다'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뭐래, 무슨 예술품이야? 얼른 지워요."
저는 삐죽 대며 아들을 한번 흘겨보기 바빴습니다.
근데 남편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제가 바가지를 그리 긁었는데도 결국 지우지 않았어요.
저는 이해할 수 없었고, 얼마나 귀찮으면 아직도 놔두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뒤, 저는 아들방을 청소하는데 또 벽에 낙서를 발견합니다.
한숨을 내쉬고, 씩씩거리며 걸레를 들고 닦는데 아들이 한참 연습 중인 자신의 이름을 흉내 낸 낙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설프지만 제법 확실한 '우'자를 보니 자기 이름에 들어가는 '김'자와 '우'자 흉내 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잘 못 외우더니... 그래도 자기 이름을 쓸 생각을 했네...'
제법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낙서 주변이 반짝반짝 빛나는듯하여 차마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전 청소도구들을 뒤로 물렀습니다.
며칠 전 남편의 마음도 그러했을까요?
지금도 남편 책상의 컴퓨터에 남은 낙서도 여전히 지우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김'을 쓰려다 말았지만, '우'자는 확실히 쓴게 그래도 기특합니다.
그렇게 아들과 저의 영역싸움은 허망하게도 저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역시....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는 모양입니다.ㅎ
지금도 아들은 아무 데나 낙서를 합니다.
아주 심각한 정도만 아니면 이제는 저도 못 본 척 지나칩니다.
이제 우리 집 곳곳에 아들은 점령 중입니다.
저만의 화려했던 인테리어 꾸미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못하고 지금은 한쪽 구석 자리를 정해놓고 적당히 제 기분만 내는 정도로만 꾸미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어느 시절처럼 기합을 잔뜩 넣어 꾸미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못하는 거죠.ㅎㅎ
그래도 제 공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속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나니 오히려 좀 편안해졌어요.
어쩌면 무리해서 힘이 들어간 제 어깨에 힘 좀 빼라고 아들이 도와준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듭니다.
요즘 저희 집에서 아들의 낙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저희 딸도 전에는 동생이 낙서했다고 저에게 달려와 이르기 바빴는데, 요즘은 "또 했구나..." 정도로 보고 넘어갑니다.
이제는 되려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 자라고 나서 이 낙서 흔적들을 보며 "네가 이런 장난으로 엄마를 골려먹었었다"라고 추억하며 웃을 수 있을 테니까요.
너의 흔적을 우리 집에 오래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더 늘어날 아들의 낙서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