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아 Mar 23. 2024

2화. 벽을 보고 대화하는 부부

부부는 갑과 을이 없다.

의미없는 말보다 침묵하는 편이 좋지만,

침묵은 짧을수록 좋다.






“배우자와 핸드폰을 내려두고 티브이를 끄고 얼마나 길게 대화를 할 수 있나요?”     


30초만 생각해 보고 답을 말해보자.

여러 답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과연 부부라는 이름을 하고 얼마나 많은 대화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까?     

카페나 음식점에 가면 눈을 마주하면서 대화하는 부부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에게 모든 신경을 쓰거나 가족 모두가 핸드폰 액정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이런 모습이 집에서라고 크게 다를까?     

살림하느라 바쁜 두 사람.

아이의 뒤치다꺼리하니라 바쁜 두 사람.

혹은 맞벌이로 지친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은 두 사람.     

온전한 자기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서 함께 있는 시간은 침묵을 택하고는 한다.


눈은 핸드폰 귀는 티브이 소리.

분명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마주하고 있는 것은 서로가 아니다.

물론 침묵과 자기 시간이 보장이 되어야 더 나은 사고를 하고 온전한 쉼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자기 시간이 보장되는 것을 바라는 나머지 부부의 대화가 단절되고 있다.     

막상 대화를 할 수 있는 판이 깔리면 오히려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를 모른다.

어색한 적막만이 흐른다.

적막의 깊이는 결혼 연차가 쌓일수록 더 깊어진다.


결국 어렵게 시작한 이야기는 아이이야기.

아이이야기로 시작해서 육아방침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게 된다.

이는 다시 이전의 서운하고 잘못했던 것들을 다시 소환시켜 갈등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분명 대화를 하고자 하는 자리여도 결국 싸움으로 이어진다.

오순도순 대화를 하고 싶은데 결국 논쟁으로 이어진다.


과연 오늘만 이럴까?

반복의 일상이다.

반복은 좋은 습관을 만들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반복은 마음을 무척이나 지치기도 한다.     

부부들은 대화가 필요하다.

아주 절실하게 말이다.

그런데 대화를 하더라도 어떤 대화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대화란?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       


나는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주하여 토론이 되기도 하고 논쟁이 되기도 하고 싸움이 되기도 하기에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모든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부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싸움이 잦다.

그나마 한글교육과 더불어 수화교육을 잘 받았다면 의사소통의 문제가

조금은 해결되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는 작은 오해도 작은 의견도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청각장애를 가진 부부는 싸움이 잦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온전한 대화의 진행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봐왔다.

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할 노릇인가.

내가 A를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은 B를 이야기하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커질 수밖에 없다.

소통에 차질은 오해에 오해를 더해 감정의 골을 한 없이 깊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신체적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없는 부부인데 마치 의사소통이 안 되는

사람처럼 부부생활을 이어간다.

내주장이 맞고 상대방 주장은 틀린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분명 꽃다운 나이 서로 잘나고 서로의 모습이 아름답고 멋져서 결혼을 선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는 인생을 가르치려고 하고 답답해한다.

뻔히 나의 억양과 날 선 단어선택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것을 알고서도

의도적 혹은 무심코 말을 꺼낸다.   

한때 사랑의 이름으로 지금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당연한 듯이 받아야 하는 의무는 전혀 없다.

  

대화의 기술, 소통의 기술, 말 잘하는 법을 주제로 가진 책들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대인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읽히는 책들이다.

그런데 대상이 직장 상사, 친구, 동료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지만,

정작 적용해야 할 사람에게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무용지물 자기 계발서이다.     

모든 대화의 능력과 아이템들은 집 밖에서 다 사용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대화의 기술 전원은 꺼버린다.

그리고는 무색무취 아무 감정 없이 내뱉는 말들은 상대방에게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힌다.

혹은 입을 닫아버린다.

남자든 여자든 직장생활 반만큼 배우자에게 대화를 한다면 아마도 대화로 인해 상처받는 횟수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간혹 직장에서도 싸움닭 혹은 사냥개처럼 으르렁 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살아갈 때 잘잘못은 필요가 없다.

(보증 또는 도박 기타 등등 이유로 돈을 까먹었다면 잘못이 맞다.)

가족은 한 지붕에서 다른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먹고 잘살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잘잘못보다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잘하는 부분은 칭찬해 주면 된다.

아주 단순한 논리로 생활을 해야 한다.

결혼을 불행하고자 시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꾸 잊게 된다.

불행이 아닌 행복을 위해 선택한 결혼 생활을 말이다.

누군가는 훈계하고 누군가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상대방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내가 하는 희생은 고귀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분명 행복을 위해 꾸린 가족인데 세상 누구보다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인다.

이런 삶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도 최근에 아내와 대화를 할 때 굉장한 실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무언가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있으면 나는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끼어들기를 시작한다.     


“에헤 그것은 아니지!”

“아니 그건 말이지!”     


잠시를 참지 못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훌륭한 위인들과 성공한 사업가들은 말한다.

상대방 말에 경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들처럼 못되고 있나 싶기도 하다.     


여하튼 내가 아내의 말을 잘라먹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이후로 습관처럼 나오는 끼어들기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아내가 입을 열면 우선 내 입술을 더 꽉 깨물어본다.

그리고 두 귀에 고막은 힘껏 힘을 주어 경청을 하려고 한다.

아내의 말이 끝나면 그제야 입을 열어보려고 한다.     

사실 습관성 끼어들기는 한 번에 고쳐지지 않았다.

지인들 말은 경청하면서 정작 아내에 말에 경청하는 자세는 빵점인 남편이었다.

그래도 노력하려고 한다.


지금 하는 노력이 내가 할아버지가 되고 아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밥 한 번이라도 더 맛나게 얻어먹는 그런 작은 씨앗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화가 없이는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

입을 놔두고 왜 눈빛만으로 마음을 전달하려고 할까?     


오늘은 집에 돌아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사 혹은 친구 혹은 손님과 대화하는 것처럼 상냥하게 미소 지으면서 이야기해보고 경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못할 것은 없지 않겠는가?

이전 02화 1화. 세기의 논쟁 치약 짜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