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나의 대학원생 이야기>에 실렸던 이 글을 조금 더 풀어서 썼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했던 2020년 2월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2022년 5월)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이해해주세요.
?? : 여보세요?
나 : 네?
?? : 반갑습니다. 저는 코로나19 역학조사관입니다.
나 : ?????????
2020년 2월, 나는 겨울방학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1년 반 동안 쌓아왔던 마음속의 고민도 다 해결되었고, 짧고 강렬했던 교회 행사도 끝났다. 다음 달엔 학교에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도 살짝 들었지만, '그건 그때 가서 겪으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가벼이 웃어넘겼다.
그렇게 한가로이 방학을 보내던 그때, 우리 교회 청년부에 나오던 한 친구가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때 그 친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살짝 걱정했지만, '에이...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가벼이 넘겼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코로나19에 걸린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병 때문에 한꺼번에 아팠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교회 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다. 교회 문은 닫았지만, 비상연락망을 통해 모든 교인들에게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받아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은 오미크론 변이의 영향 때문에 하루에 만 명, 십만 명씩 걸린 적이 있었지만, 코로나19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 당시에는 몇십 명만 걸려도 중차대한 위기 상황으로 간주되었다.)
이틀이 지난 월요일 아침, 우리 가족은 보건소를 방문했다. 보건소 측에서 찾아와서 검체를 채취해준다고 했지만, 선별 검사소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인파를 보니 '우리를 위해 인력을 파견하는 게 어렵겠구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섭섭했던 마음을 접고, 네 가족 모두 PCR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가족들은 월요일 오후쯤에 음성 판정을 받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코로나19의 'ㅋ'자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 청년부의 단톡방만 울릴 뿐, 보건 당국으로부터 문자메시지는 전혀 받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오후가 훅 지나가버렸다.
그날 저녁 6시, 갑자기 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근데, 문자가 아니라 전화가 왔었다. 보건 당국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로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역학조사관으로부터 걸려 온 또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아, 내가 코로나19에 걸렸구나.'
2년 전만 하더라도 '코로나19는 폐가 약해지고, 굳어지는 질병이지만, 아무런 치료법도 나오지 않았다.' 정도의 정보만 있었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과 싸우며 언제까지 병실에서 격리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확진 판정을 받고 하루 정도 기다리니, 나를 실으러 온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무겁게 싼 캐리어를 들고 비닐로 꾸며진 구급차에 타니, 사지가 멀쩡한 내가 중환자가 된 것 같았다. 집을 떠나 병실로 갔을 때 느꼈던 먹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