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에 주석 달기

일기 쓰는 이유 (2)

by 이름

지난 글에서 '글감 발굴 연습'을 위해 일기를 쓴다고 얘기했었는데, 이건 사후적으로 발견한 일기 쓰기의 기능에 가깝다. 이미 일기 쓰기에 습관을 들이게 된 다음, 돌아보고 나니 ‘일기 쓰기에 이런 장점도 있네?’ 싶었던 특징인 것이다. 오늘 말하려는 두 번째 이유는 일기를 쓰지 않던 시절에 일기를 쓰게 만든, 더 원초적인 이유이다.



씁쓸한 끝맛을 가져야 비로소 추억이 된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추억에 잠기는 걸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많이 좋아하지만, 그 시기에는 즐기다 못해 중독되어 있었달까. 그 이유는 그때 처음으로 추억을 가져봤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전에도 물론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해 본 적은 있지만, 단순히 기억을 회상하는 것과 추억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회상은 단순히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는 일이라면, 추억은 완전히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다. 다시는 그런 시기로 돌아갈 수 없음을 함께 감각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기억을 함께 만든 사람들(대부분 친구들)과 그런 비슷한 순간을 다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평생 함께할 것 같았던 가까운 친구들과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점차 멀어지면서, 어떤 시절이 완전히 지나갔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그런 비슷한 순간을 만들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그들과의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는 일은 이전과 달리 늘 씁쓸한 끝맛으로 마무리됐다. 추억은 즐거움뿐만 아니라 약간의 슬픔까지 가져다주는 거구나, 그때 깨달았다. 즐거움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에 매료되어 추억하기에 푹 빠지게 됐다.



추억하기 위한 일기 쓰기

내가 추억하길 좋아하는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크고 특별한 사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자잘하고 사소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도 쉽게 휘발된다. 그래서 미래의 내가 추억하기를 편히 즐길 수 있게 대비하기 위해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매일 쌓아가는 자잘하고 사소한 경험들을 먼 훗날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이 경험들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다가 결국엔 사라져 버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꼼꼼히 기록했다.


그런데 일기를 쓰다 보니 단순히 그날 있었던 일만 적는 게 아니라, 그날 떠올린 과거의 경험들까지도 함께 기록하게 됐다. 그날 그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특별한 계기, 그걸 추억하며 느낀 감정들을 적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추억 속 장면들까지도 상세히 담아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추억을 최대한 오래 보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소중한 추억이라도 떠올릴 때마다 일부분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기억 속 장면들을 추억할 때마다, 오늘 떠올린 기억만큼은 더는 휘발되지 않도록 최대한 생생하게 일기장에 기록하려 했다.


어떤 장면은 떠오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기록하다 보니, 일련의 장면 중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게 되는지가 늘 달라졌다.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된 계기와 이유, 그 추억이 내게 가져다주는 감정들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게 일기를 쌓아가다 보니 처음엔 일기 쓰기란 추억 속 장면을 사진 찍듯이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정확히는 그 장면에 주석을 덧대는 일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장면에 주석 달기

동일한 장면이 일기장에 반복적으로 어떻게 적혔는지를 쭉 읽다 보면, 그 장면이 내게 가지는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장면 속 누군가를 향한 내 태도가 달라져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때 당시에는 엄청 미워했었는데, 몇 번 반복해서 그 장면을 되새기는 동안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추억이 일기장에 거듭 적힐 때마다, 일기장에 묘사된 구체적인 장면과 거기에 덧대인 나의 감정적 주석이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추억하기란 특정 장면에 대한 나의 주석을 하나 둘 쌓아가는 행위이다. 혹은 일기장을 통해 여태까지의 주석을 함께 훑어보며 내 궤적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어떤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는 것보다, 그 장면의 의미가 그동안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나아가 결국 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여다보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내가 일기 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장면 하나

(장면에 주석 단 기록들을 이 매거진에 하나둘 쌓아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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