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72시간 이내에 그, 그 약 먹으면 되는 걸까요?

그래, 방법을 찾아보자.

by 보건쌤 김엄마

< 보건실 그리고 성 고충상담실>



보건실임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보건실>과 <성 고충상담실>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적혀있다.

그래. 이곳은 보건실이자 성 고충상담실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보건실이 성 고충상담실 역할을 겸하고 있다. 상담 선생님이 계시는 <위클래스>에서도 성관련 문제를 다루어주시지만, 건전한 이성교제의 선을 지나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거나 임신 출산의 우려가 있는 상황이라면 보건실로 보내주시는 경우가 있다.


고3. 이정상!

이름이 참 멋지고도 특이하여 학기초부터 단번에 기억할 수 있었다.

정상이도 보건실 문 손잡이가 닳도록 자주 오는 녀석이었다.

사유는 역시나 "두통"! 거의 늘 약을 먹길 원했다.


순순히 약을 내어주지 않는 나의 태도에 정상이는 더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내가 약을 내어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있기도 했다. 수업 중간에 내려와서 머리가 아프다고도 하고, 종이 쳤으나 올라가지 않고 보건실에 있기도 했다.


고3이라 꼬맹이 대하듯 혼을 낼 수도 없고, 무턱대고 밀어내고 내칠 수도 없어서

두통약의 성분과 투약 용량 및 복용 간격과 작용 시간 등등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상이와 대화할 일이 조금씩 늘어났고, 늘 찡그린 채 아프다고만 하던 녀석이 살짝 미소를 보이기도 하며 "그냥 왔어요. 잠시 있다 갈게요."라고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렇지만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보통의 야성적인 남학생들과는 많이 다른 아이였으니...


정상이는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이다.

현재는 자연계열, 수학과를 지망하고 있다.

수학학원을 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음악적인 부분에 다재다능한 편, 작곡도 했었고, 클라리넷도 멋지게 연주하는 재주꾼!


정상이는 3개월 정도 전부터 체중이 10kg가량 빠졌다고 한다. 이 정도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중이 많이 늘어났다. 어떤 아이들은 1년 새 10kg가량씩 늘어나기도 했다. 집에서 잘 챙겨주시니 맛나게 먹고, 학원 오가는 길에 사 먹고, 밤에는 야식까지 챙겨 먹으니 몸무게가 쑥쑥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정상이는 몸무게가 10kg가량 빠졌다고 한다.

고민이 많아서 작년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잠시 우울증 약을 먹었다고도 한다.

작년에 했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은 좋아져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으니 거기까지.

캐물어서 안 좋은 기억을 꺼낼 필요도 없고, 지금 괜찮다고 하니 지금의 문제만 이야기해보기로.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보건실에 내려오셨다. 정상이가 보건실에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학교에서는 담임쌤이 주보호자이자 엄마 역할도 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상의하고 챙기는 사람이 담임이다. 다행히 정상이네 담임 선생님은 더 다정하고 따뜻하셨다.


몇 달 후면 졸업하고 어른이 되니, 성적 외에도 담임으로서 신경 쓸 부분이 있으면 챙겨주고 싶다고 하셨다.

상담해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달라며..

진심이 느껴졌고, 참 따뜻한 선생님 같았다.

나 역시 고민상담과 건강관리, 체중관리, 식이와 비타민 복용 방법 등 관심 갖고 챙겨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쭈뼛쭈뼛 망설이며 보건실에 들어온 정상이가 어렵사리 질문을 한다.


"쌤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저.. 그. 그. 약 있잖아요. 72시간 이내로 먹으면 정말 효과가 있는 거죠?"


당황스러웠지만, 당황하지 않고

놀랐지만 놀란 척하지 않은 채 대답해주었다.


"그러엄. 약은 효과가 있지. 그런데 네가 말하는 약은 사후피임약을 말하는 거니?" 내가 물었다.


"네에." 정상이가 대답했다.



"그래, 그런 일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은 후에 복용해야 해. 약의 효과에 대해서도 의사 선생님께 상담받아야 하고. 네가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이 있었어?"


"네에. 사실은 올해 초에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요, 여자 친구랑 얼마 전부터 몇 번 그걸 해봤거든요... 이번에 좀 실수가 있었어요. 날짜도 안 맞았고, 그것도 빠져버렸어요..."


'어머나,,, 이를 어쩜 좋을까?'

직업이 보건쌤일 뿐, 그냥 간호사!

다친 아이들 돌보고 처치해주지만 이렇게 성 문제로 깊은 상담이 훅 들어오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이 녀석이 그만큼 날 믿고 의지하여 물어보는 것인지 성 고충상담실 글자를 보고 용기를 얻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짓말이거나 장난 같진 않았다. 늘 차분하고 장난기 없는 학생이어서 내가 느끼는 당혹감은 제법 큰 편이었다.


다행히 보건실에 다른 학생들이 한 명도 없어서, 정상이를 앉혀놓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제법 깊은 이야기였고, 제법 걱정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이하 19금...

대범한 아이들은 더 능청스럽게 처리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모험담을 늘어놓듯 자신의 경험을 떠벌리는 아이도 있었다.

보건 수업 시간에 성교육을 할 때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급 학생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영역일 뿐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데.. 이번 경우는 본인이 많이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정상이는 그 주 토요일 오전에, 모 산부인과 의원에 여자 친구와 함께 다녀왔다고 했다.

처방받은 약을 복용했고, 걱정을 덜었다며 그렇게 고민의 산을 내려간 것 같았다.



학생들의 성 경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는 내용은 많이들 접해봤을 것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화면들이 쏟아진다.

야동..이라는 올드한 단어는 초5, 6들도 알아들을 정도이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의 주 테마가 되기도 한다. 교과서와 매뉴얼도 있지만, 어떻게 알려주고 도와줘야 할지 늘 고민하며 수업을 하고 있다.


정상이는 그 이후 발걸음이 좀 뜸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 많이 불편해서였을까?

보건실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어 최근엔 거의 못 본 것 같다.


신체에 국한된 성 문제 외에도 성희롱, 성폭력 및 사이버 폭력과 스토킹, 음란 사진 합성을 통한 미디어 폭행 등이 있다. 그리고 언어폭력, 신체 폭행, 약물이나 음주 문제 등 급변하는 세상에서 놀랍도록 빨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부모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기도 하고, 가담한 격이 되어 있기도 하며, 그만큼 당하기도 한다.


초딩때처럼 따라다니면서 케어해줄 수도 없고, 물어도 답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몇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학생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부모님께 뭔가 어찌 됐건 아무 많이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 놀란 얼굴로 큰소리치며 당황하지 않기

* 자지러지며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치지 않기

*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세 번 네 번 반문하지 않기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같은 편이자 해결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탓하고 때리고 소리치며 엄마가 울고 있으면 아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꺼냈을 때 당연히 놀라겠지만, 소리치고 놀라 자빠지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부모님과 상의할 수 있는 관계만 유지된다면 많은 부분 가다듬으며 커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엄마 아빠는 네 편이 되어 도와주겠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던져주면 좋겠다.

내 자식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쉬 넘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 그 후에 수습하고 처리하는 일에 도움이 필요함을 얘기해주면 좋겠다. 과일과 음료수 내어주고 간식 먹고 있는 어느 편안하고 한가한 타이밍에, 훅 한 번씩 날려주시길 바란다.


"어떤 일이 생겨도 엄마한테 말해~ 같이 상의하고 의논해서 해결해보자."

"만약 네가 사고를 쳤다고 해도 괜찮아. 제일 먼저 연락만 해줘. 그럼 어떻게든 같이 해결해보자."

더 이상 말이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니 짧고 굵게! 메시지만 던져주자.

내가 네 곁이 있으니, 어떤 일이 생겨도 같이 상의하자. 그렇게 말이다.

뜬금없는 소리지만, 애들은 잘 기억할 것이다. 왜? 황당하고 어이없는 엄마의 난데없는 멘트였기 때문에.

그것의 유효기간이라고 해봐야 중고교 생활, 재수 포함 길어야 6~7년일 것이다. 그 이후엔 쩜쩜쩜

학생들이 따뜻한 환경에서 안심하고 자랄 수 있길 바란다.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따숩게 한번 안아주면 좋겠다. 과일 내어주며 손가락 하트도 날려주면 좋겠다.

반응이야 뭐 늘 그렇듯 "아니, 엄마! 오늘 어디 강연 다녀오셨어요? 누가 또 안아주라고 했었나 봐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 보자. 언제든 와. 무엇이든 물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