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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진 Jan 18. 2024

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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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꽤 시간이 지난 뉴스 기사를 찾아보다가,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 정치인들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았던 것 같다. 그들의 업적이나 평가, 뭐 그런 것들은 나의 영역이 아니니 패스. 무엇보다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들이 사용하던 표현들이었다. 기사 속 그들은, 지금의 정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단어들을 꽤 많이 쓰곤 했다. 대개 낯설고 복잡해 휙휙 지나쳐 내려갔지만, 그 중 유독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단어가 하나 있다. ‘몽니’였을 것이다.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이런 표현을 쓰는 이들을 만나볼 수가 없기에, 형태만 가지고서 그 뜻을 번뜩 알아채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몽니가 어떤 말이냐 하면…단어의 사전적 의미, 그리고 그걸 담고 있는 외형 사이의 거대한 괴리나 간극을 가진 단어. 둥글둥글하고 포근한 어감과는 다르게, 실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다. 보통 심술이나 억지를 부리는 것을 두고 ‘몽니를 부린다’라고 표현한단다.


 기사 속 정치인들도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상대 당의 사람들에게 억지 좀 부리지 말라는 맥락에서 ‘몽니를 부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참, 와 닿지 않는다. 그 말이 담고 있는 거친 의도와 불만을 표출하기에, ‘몽니’라는 단어의 어감은 너무나 귀엽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사어가 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걸까. 격한 불만을 표현하기엔 외형이 너무 몽글몽글하고, 이런 애매한 어휘를 사용하기엔 거칠고 험한 은유를 담기에 알맞은 대체어들이 너무도 많으니. 하긴, 요즘 정치의 언어에서 ‘심술’ 정도의 의미는 애교에 가깝다. 혐오와 무질서한 편가르기, 그리고 폭력이 상주하는 우리의 정치에서 ‘몽니’라는 단어는 그저 애교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몽니’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키고 서야 할 최소한의 선을 정해 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불만이 있어도, 그저 ‘심술’ 정도의 선에서만 표현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아슬아슬한 그 경계를 넘어,  혐오나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금은 귀여운 몽니를 부려 보고, 그것을 마주한 상대방은 조금 거추장스럽고 피곤하더라도 그 서운함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것. 그것이 그나마 온건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차라리 몽니를 부렸으면 하는 순간이 더러 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리의 사회. 불만은 말에 앞서 행동으로 거칠게 드러나고, 그 결과는 더욱 끔찍하고 비참한 결과를 낳곤 한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건 몽니라는 귀여운 단어로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무섭고 비정한 폭력의 시대인가.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옛 뉴스 기사에서 이런 옛 단어들을 꺼내 되새겨본다. 정치 하시는 여러분, 차라리 몽니를 부려 보세요. 혐오의 정쟁은 이제 그만! 적어도 단어만큼은 상냥한 것으로 골라잡아 투정을 부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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