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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진 Jan 13. 2024

숨탄 것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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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예전에 자주 쓰이던 ‘노장은 죽지 않는다’와 결이 비슷한 표현인데, 한편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온전하게 ‘늙는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말로도 들린다. 모두들 축복 속에 귀하게 태어나는데, 어째서 어떤 목숨은 그렇게도 일찍 바스라질까.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 속에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구할 수 있었던 생이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언제나 마음 한 켠이 아리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그 수만큼 많은 애도를 보고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그러한 숱한 죽음 중, 우리가 막을 수 있었던 것들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그토록 절절한 타인의 슬픔에, 사람들이 잔인하리만치 무감하다는 것이다. 여기, 이 두 번째 이유는 또 다른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불행에 절망적으로 무관심한 우리 사회. 이 비정한 세계는 슬픔에 젖은 이들이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도록 방치한다.


 tvN의 토크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박주영 판사. 그는 『어떤 양형 이유』라는 인상적인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판결문에 다 담을 수 없는 판결의 뒷이야기, ‘양형 이유’에 대한 인간적인 해명을 적어내려간 글이라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법정이라는 공적인 영역의 한가운데서 그토록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이의 이야기에 어떻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나. 그렇기에 내게 그는 판사이기 전에 작가이고, 인간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가장 큰 요인. 그러니까 박주영 판사를 가장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그가 진행한 재판의 기록 때문이었다. 울산지방법원의 2019년 판결 기록이며, 사건 내용은 다름아닌 ‘자살방조미수’. 그는 법을 집행하는 판사의 입장에서 피고인들의 행위에 대한 법리적 해석을 적용하고 판결을 내리는 동시에, 이웃 시민의 입장에서 고독하고 슬펐을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 고뇌의 기록이 이 사건의 양형 이유란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 그럼에도 우리가 이 모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엉망진창임에도 우리가 미련스럽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무릇 모든 숨탄 것들의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고 싶다. 그 절대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고통이, 이처럼 자주, 이처럼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생활고로, 우울증으로 세상에서 고립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잘 살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숨탄 것들의 거부할 수 없는 본능, 목숨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으레 품을 수밖에 없는 원초적 욕망.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 끈질긴 열망조차 꺾어버릴 정도의 슬픔과 고통 또한 세상에 만연하다. 또한, 그것을 나눠지고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아 줄 이웃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눈을 돌리고 귀를 열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할 때,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 철저한 고독 속에 버려질 때, 그들의 이야기는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고려할 때, 사람의 죽음은 결국 소통의 단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라는 어느 소년만화의 명대사처럼,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잊을 때마다 어떤 이는 생을 등지고 말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것, 귀를 열고 목소리를 듣는 것, 타인의 존재와 그 아픔을 잊지 않는 것. 온갖 구호와 대책이 난무하여도 자살률이 끊임없이 치솟는 오늘날, 소중한 ‘목숨’들을 잃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은 당신의 이야기가 혼잣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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