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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진 Jan 06. 2024

밤잔물

3

머리맡에 물잔을 두고 자는 날이 많다. 밤을 지나고 나면 부쩍 목이 타곤 해서. 요즘은 날이 다소 건조해졌다. 일어나면 눈과 코와 입, 그리고 목구멍까지, 건조하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 바싹 말라버린 입에 물을 흘려 넣어 주지 않으면…(과장 조금 보태서)고통스런 아침이 된다. 그것이 아침의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가끔 너무 건조한 날에는, 해도 올라오기 전의 짙은 새벽에 어쩔 수 없이 깬다. 눈은 건조해서 침침하고, 추운 날씨 탓에 고온으로 설정해 둔 전기장판은 방이 더 퍼석퍼석 말라붙게 만든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바스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일 만큼 건조해진다. 얼른 물을 들이켜지 않으면 목구멍도, 입술도, 그리고 내 작지 않은 이 몸뚱아리도 모두 잘게 바수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든다고 하면 과할까.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물잔을 찾는 일, 그것도 꽤 버겁다. 손 끝으로 머리맡을 더듬어가며 자리끼를 찾곤 하는데, 나는 대개 칠칠맞은 사람이라 그러다 잔을 엎질러 이불을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밤의 시간은, 그 어둠은 이 물 한 잔조차 쉽게 마실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만다. 겨우 손에 닿은 물잔을 잡고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이면, 그 순간은 퍽 행복하다. 그런데 끝맛이 뭔가 개운치 않다고 느꼈던 것은 그저 착각일까. 밤새 내려앉은 먼지의 맛, 혹은 어떤 다른 존재들이 나보다 앞서 목을 축이고 간 흔적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가끔은 찝찝함이 남기도 한다. 그 때문에 요즘은 컵의 위에 항상 덮개를 올려두고 잠에 들지만, 피곤한 날에는 몸을 자주 뒤척여 그 덮개가 떨어지는 일도 종종 있기에 불안감은 잘 없어지지 않는다. 눈을 뜨고 컵을 손에 쥐려 할 때, 컵과 덮개 사이에 벌어져 있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틈. 그것 하나만 보여도 괜히 신경이 쓰여 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다. 이건 결벽증에 가까우려나.


길어 봤자 기껏해야 여덟 시간 내외. 내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하루의 3분의 1도 안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 마치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 듯한 나의 물 한 잔. 밤을 지낸 자리끼는 으레 ‘밤잔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말 그대로 밤을 잤다는 뜻일까. 다소 뚜렷한 이 단어의 형태로부터, 그 의미를 꺼내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거, 조금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는 어휘 아닐까. 나는 밤을 자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잠’을 자거나 밤을 ‘보내는’ 것이 아닌, ‘밤을 자는’ 일. 가끔 시덥잖은 음모론이나 로어를 읽는 걸 좋아하는데, 대개 대충 훑어보고 치우는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들이지만…내게 꽤 많은 생각을 던져준 것이 하나 있었다. ‘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더 정확히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의 나’는 잠을 자면서 휘발되고, 몸만 남은 껍데기 속에 또 다른 ‘내일의 나’가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치 컴퓨터처럼, 메모리 카드에 저장된 기억만 남겨지고 ‘나’라는 존재는 밤마다 교체되는 거란 말씀.


당연하게도 허황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건 결국 문학에 빠져드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재미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존재는 결국 변화하는 것, 언제나 고정된 것이 아닌 밤마다 뒤바뀌는 가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렇다면 어제의 자리끼와 오늘의 밤잔물이 그 이름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아주 다른 존재라는 이야기 또한 조금은 말이 된다. 그리고 가끔은,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오늘의 비루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경계의 의미로 기억만 메모리 카드에 저장해 두고 마음은 휙 교체해 버리고 싶다. 부끄러운 마음은 내려놓고, 개운한 나로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 밤을 지새며 먼지를 뒤집어쓴 자리끼를 개수대에 휙 부어버리듯, 모나고 창피한 마음들도 그렇게 덜어내고 싶다. 그리곤 정수기에 컵을 내려놓고, 얼굴이 비쳐 보일 만큼 투명한 물을 새로 받는 거다. 망설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켜며 새 아침을 시작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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