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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옥현 Oct 31. 2021

소백산

겨울 등반

   지루한 겨울방학. 나는 왜 여행이나 재밌는 일들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 친구들이 먼저 연락을 줬고 나는 흔쾌히 아니 순간적으로 맘 속에 발동을 일으키며 이미 그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해 겨울에도 집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뒹굴고 있자니 좀이 쑤시고 눈치도 보이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마침 안방에서 뒹굴고 있던 터라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성우냐? 뭐해? 너 별일 없으면 나랑 소백산 등산이나 갈래?"

   "그래? 우와 대환영! 언제 갈까?"

   민욱이는 맘씨도 너그럽고 술도 좋아하고 소탈하며 놀기도 좋아하는 친구다.

   당장 계획에 들어갔다. 텐트와 함께 침낭과 쌀이랑 김치, 몇 가지 부식 재료들 그리고 버너, 코펠 등등 서로 집에 있는 것들 맞춰가며 준비를 끝냈다.

   "내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보자."

 

   단 둘이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메고 에베레스트라도 오를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영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4시간 넘게 걸려 영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일단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버스를 다시 타고 희방사 아래에 내렸다.

   날은 흐렸고 약하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미 도로 주변에는 많은 눈들이 쌓여 있었고 버스도 속력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흐린 날씨에 산악지대라 날은 벌써 어둑어둑했고 눈발도 더 굵어지는 양상이라 오늘은 아예 산을 오르기 힘들었다. 당시는 인터넷이고 뭐고 없었고 예보도 자주 하지 않았으며 정확도도 떨어졌다.

   "산은 내일 올라가고 일단 근처 묵을 곳 좀 알아보자. 길가에 텐트 치고 잘 수는 없으니......"

   다행히 희방사 아래에는 민박을 하는 집이 있었다. 요즘처럼 관광지가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식당이나 상점은 없었고 본격적인 숙박시설도 없었다. 촌집에서 방만 내주는 그야말로 민박이었다.


   챙겨 간 쌀로 밥을 짓고 꽁치통조림찌개를 끓여 소주 한 잔 곁들이며 나름대로 겨울산을 음미하고 있었다. 주위는 정말 조용했고 구들목의 촌집이 나름대로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민욱아. 너 등산 많이 해봤어?"

   "뭐 본격적으로 한 건 아니고 몇 군데 좀 올라가 봤지. 내가 산을 좀 좋아하지. 근데 이렇게 눈 쌓인 산은 사실 처음이다."

   "난 사실 산을 별로 안 좋아해서 별로 다닌 적이 없어. 너도 알잖아? 우리 과 여행 갔을 때 다들 설악산 등반해서 반대편 다음 목적지에 집결했지만 나랑 몇 명은 차 타고 둘러서 다음 목적지까지 갔었잖아."

   "난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모두 정상을 밟았지."


   가져 간 술도 떨어지고 배도 부르고 적막한 긴 겨울밤에 즐길거리를 준비했다. 둘이서 치는 고스톱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점수도 많이 나고 갖가지 내기를 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단 둘이 이런 산골에서 겨울밤 군불로 따뜻하게 데워진 촌집에서 치는 고스톱이 정말 재밌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깜깜한 사방은 마른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정말 조용했다. 겨울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으로 정취는 한껏 무르익었고 고스톱 재미에 빠져 거의 밤을 새웠다.


   쪽잠을 자고 난 부스스한 아침. 남은 밥과 찬으로 서둘러 아침을 챙겨먹고 배낭을 짊어졌다. 대망의 목적지인 겨울 눈 덮인 해발 1439미터 소백산 등반을 시작했다. 눈은 그쳤지만 바람은 매서웠고 쌓인 눈을 헤치며 희방사로 향했다. 절로 올라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음지에 있는 눈은 푸석거렸으나 아래에는 얼어 있었고 양지의 눈은 아직 아침인지라 녹지 않았다. 게다가 내 신발은 등산화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등산 장비가 보편적이지 않았고 등산에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드디어 희방사에 도착했다. 눈 쌓인 절은 고요했고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절 구경할 여유 없이 바로 등산길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등산로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경사도 심했고 돌이나 바위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 드러나지 않아 디디기 힘들었다. 얼음이 덮인 곳과 아닌 곳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성우야. 너 괜찮냐? 이거 계속 올라가도 될까 싶은데?"

   "그렇지? 야 힘들다. 안 되겠다."

   에베레스트도 오를 듯이 의기양양했던 나는 눈치만 보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하여 소백산을 30분 정도 등반했다. 그것도 왕복.


   아침 먹고 나선 지 한 시간도 안되어 다시 나타난 두 등산객을 본 민박집 할머니는

   "이 눈길에 우예 산에 간다꼬. 내 속으로 걱정되디만......그래 하루 더 묵을라꼬?"

   금세 얼어버린 발을 녹이며 노곤한 김에 한숨 자고 점심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는 또 고스톱 2차전을 벌였다. 어젯밤에 이어 2차전도 나의 승리였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고스톱은 정말 재밌었지만 내 인생 통틀어 칠만큼 친 것이 되어 이후로는 재미가 없어졌다. 사실 뾰족이 다른 할만한 것도 없었다.


   그 후로 우리는 보지도 못 한 눈 덮인 소백산 정상은 정말 아름다웠노라고, 힘들었지만 두 번 다시 기 힘든 경험을 하고 왔다고, 카메라를 가져갔어야 했다고......




사진: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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