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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10.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상

수원. 메가박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자를 깨닫게 하는 영화이다. 천천히 하늘을 가르는 무성한 나뭇가지 테이크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박자이다. 그 박자에 굳이 몸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기억만 하고 있으면 된다.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박자, 그러니까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방식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인식하면 된다. 긴 시간동안 흩트러지거나 모나거나 깨지는 것 없이 고요하다. 마을의 심부름꾼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분)의 느릿하게 고저가 없는 억양도 마찬가지이다. 타쿠미의 시선에 비치는, 당연하다는 듯 각자의 일을 하고 돕고 사는 마을의 풍경도 어색한 것 없이 당연하게 흘러간다. 파문 하나 없이 차분히 나아갈 길로 흘러간다. 각자의 삶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하고 그 일에 책임을 가지고 있다. 더 얻기 위해 뭔가를 더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지금과 타인의 지금에 충실할 뿐이다. 사람. 마을. 자연. 그들의 사이에서 흐름을 깨는 것은 없다. 흐름을 깨는 것이 있다면 이따금 저 멀리서 들리는 총포 소리 뿐이다. 박자를 깨뜨릴 위험한 그 무엇.

출처. 왓챠피디아

마을회 회장은 말한다. 상류의 물은 하류로 흘러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흐름에 따르면 상류의 일은 하류에 쌓인다. 그렇기에 상류의 존재들은 어떤 책임을 가지게 된다. 지금의 어떤 행동이 내일의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이다. 환경 보호와 같은 어떤 인위적 거창함을 입밖으로 낼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상류임과 동시에 하류이다. 이어져 있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홀로 박자를 다르게 하면 박자가 어긋난다. 모나고 깨어져 파문이 일고 그 파문은 다시 돌아온다. 박자가 어긋나지 않으려면 방법은 2가지이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박자가 깨어지지 않도록 박자를 인지하고 인지한대로 사는 방법. 박자가 깨어지려고 하는 순간 다시 박자가 되돌아오도록 그저 그 깨어짐을 인내하고 사는 방법. 여기에는 어떤 선악이 있지 않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당위성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과 책임의 문제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마지막 장면과 영화의 엔딩에 머리가 멍하다. 이게 맞나? 그런데 되돌려 생각하다 보면 맞다. 영화의 시작부터 타쿠미의 행동, 억양, 시선만이 아니라 지나치는 인물들의 대사들 등 모든 것이 어떤 박자를 기억하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불협하는 박자 속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선악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 그 흐름에 파문을 일으켜 박자를 어긋나게 해 모나고 깨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누군가 가는 길을 막으면 그 누군가는 어디로 가야 할까? 돌고 돌아 막은 사람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그 되돌아옴에 박자를 다시 맞추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되돌아오는 것에 부딪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해도 빤히 바라만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되돌아오는 것을 위로하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어 우리의 위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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