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Nov 15. 2024

투박하게 전하는 진심은 가닿을까?(1)

혜화. 대학로 예술극장.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초대해주신 극단 고래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됩니다.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이하, 『비명자들 3막』)는 『굴뚝을 기다리며』, 『우리』에 이어 세 번째 극단 고래의 연극이다. 극단 고래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특히 『비명자들 3막』의 전 시리즈인 2018년 『비명자들 2막: 고통이 있다』, 2019년 『비명자들 1막: 비명이 있다』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본 극단 고래의 연극을 통해 유추하면 극단 고래의 연극은 이상적인 답을 숨긴 질문을 던져 관객의 변화를 추동하려는 극이다.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해 노동의 불안과 인간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 부조리 희비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하루를 시간, 분, 초 단위로 쪼개면서 매일같이 쇄신해야 하는 현 시대에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 자체가 관객의 멈춤을 유도해 자신의 삶 자체를 돌아보며 존재의 불안에서 진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노동이 무엇인지를 사색하게 한다. 양자역학과 페미니즘을 연계해 '본다'와 소통에 대해서 고찰한 메타 연극 『우리』는 본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해 진정한 소통을 위해 올바르게 보는 것이 무엇일지를 사색하게 한다. 즉, 극단 고래는 이상적인 이미지, 사상, 이론을 심은 질문으로 관객을 사색하게 해 이상을 실재로 행하도록 하는 변화를 추동하는 극단인 듯하다.


이러한 극단 고래의 입장은 이론을 단순히 이론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때 실천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론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삶에서 실재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극단 고래의 극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투박하게 느껴진다. 흔히 이론이라 여기며 넘기기 쉬운 것들을 연극적으로 재현한 실생활에 일차원적으로 일단 접목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접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오히려 극단 고래의 세계관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실생활과 유리된 것 같은 인문학적 사고가 실제로는 우리 개인의 행동이라는 실재를 통해 실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비명자들 3막』도 불교 이론이 혐오와 고통으로 가득한 실생활에서 우리 각자의 행동으로 어떻게 드러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비명자들 3막』를 통해 관객이 혐오와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이상적인 행동을 심은 질문을 제대로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혐오와 고통의 현상과 불교 이론이 일차원적으로 접목된 점과 『비명자들 3막』의 장르적 요소에 대한 관객의 바람과 극단 고래의 입장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 같다.


1. 좀비 서사로서 『비명자들

2018년부터 시작한 『비명자들』의 세계관은 좀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비명자가 좀비와 같이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즉 죽음이 억압된(Undead)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명자들』에서 비명자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혐오와 학살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사건의 피해자들로 공시적이면서 통시적인 존재이다. 『비명자들 3막』에 따르면 한국의 비명자들은 6.25 전쟁 중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모름에도 변절자, 빨갱이 등으로 몰려 죽은 민간인, 세월호나 이태원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혹은 예방할 수 있던 상황에서 절차만 따지며 책임지지 않은 국가 시스템에 의한 재해로 사망한 민간인 등의 후손, 유족이 비명자가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즉, 비명자들은 본인들이 당한 폭력의 사실을 공인 받아 위로와 보상을 받는 것 대신 폭력의 사실을 인정 받지 못한 채 정치적·사회적·개인적 혐오와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글자의 외적 의미와 다르게 자신의 현재 삶에 가해지는 정치적·사회적 폭력에 더해 혈육, 친구, 연인 등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의 폭력으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명자들은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처럼 이지를 상실한 채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극단 고래 제공

이러한 비명자들은 100일 가까이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있어도 죽지 않으며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거나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이처럼 비명자들은 외적으로 보기에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으나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다름없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비명자들의 고통이 전이된다는 것이다. 극 중 비명자들의 비명은 주변 4km 내 타인에게 고통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청각적 전이만이 아니라 비명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접촉하면 폭력을 휘두른 혹은 접촉한 이만이 아니라 4km 내 모든 이에게 같은 부위에 극심한 고통을, 심한 경우에는 사망에 이르는 촉각적 전이를 보인다. 더 나아가 비명자들의 고통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경우에는 '보현(박윤정 분)'처럼 비명자가 되는 존재적 전이도 볼 수 있다. 즉, 비명자들은 좀비와 같은 신체적 특징만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전이해 타인을 사망 혹은 자신과 같은 비명자로 만드는, 일종의 전염이라는 양상을 보인다.


『비명자들』은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좀비 서사를 통해 현실 세계의 관객에게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당장 각 개인이 인식해 행동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로 인식하게 한다. 좀비 서사의 핵심은 죽음을 억압당한 좀비가 전염된다는 것에 있다. 바로 어제 함께 웃으며 일상을 공유하던 이가 오늘은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한 채 살을 뜯어먹기 위해 다가오는 공포와 누구나 그렇게 살을 뜯어먹는 어떤 형체로 변할 수 있다는 공포는 공포의 원인을 빠르게 해결하길 갈망하게 한다. 『비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명 아이돌 가수마저도 비명자가 되는 극 중 세상에는 언제 비명자가 4km 이내에 들어와 죽음에 가까운 혹은 그 자체의 고통을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런 비명자의 고통에 의해 자신도 비명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존재한다. 『비명자들』의 세계가 상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세계이기에 이러한 공포는 실제 현실의 관객들에게 폭력과 혐오에 대한 시급한 해결, 즉 현실의 폭력과 혐오 양상을 사유하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2. 투박한 접근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명자들』

이처럼 혐오와 고통의 역사에서 공시적이면서 통시적인 존재인 피해자를 형상화한 비명자를 해결하기 위해 『비명자들』은 불교 이론기반해 해결책을 제시한다. 파사(破邪)와 현정(顯正),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삿된 것을 부순다는 파사는 극 중에서 말 그대로 비명을 지르는 비명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표현된 반면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현정은 명확하게 정의된 방법이 아니라 비명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치유해야 한다는 주장이자 연구 중인 방법으로 표현된다. 다르게 말하면 『비명자들』은 혐오와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파사와 같이 피해자들을 물리적으로 배제하는 방식과 현정과 같이 피해자들을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한 어떤 이론적인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상이한 두 방법 모두 사성제(四聖諦)라는 수련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축약되는 불교의 주요 교의인 사성제는 극 중 파사현정 연구소의 대원들이 비명자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견디게 할 수 있는 수련법으로 대원들은 비명자들과 마주했을 때 "여기 고통이 있다. 고통에 원인이 있다. 고통의 원인을 알면 고통을 멸할 수 있다."라 중얼거린다. 사성제를 수련법으로 제시하면서 『비명자들』은 상대방의 고통을 감각하고 이해해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극단 고래 제공

하지만 『비명자들 3막』은 이러한 사성제 수련법 즉,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행위로는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고통을 이해하려는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고통 자체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자세 자체는 올바르나 그것이 어떠한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나아가 빠르게 확산 및 확장하는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사성제처럼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는 행위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에 따라 『비명자들 3막』은 이러한 사성제에 대한 반작용 혹은 부작용으로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비명자의 고통으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잃고 로봇 팔과 다리를 달아 비명자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민홍(문종철 분)'이 파사를 하는 기괴하게 뒤틀린 해결 양상을 연출하기도 한다. 비명자들을 향한 혐오에 기반해 비명자들을 파사하는 민홍의 모습은 실제 현실에서 아이돌 산업 시스템의 폭력, 국가 시스템의 폭력,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역사적 폭력 등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을 효율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시하고 배제하려는 일련의 행위를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반작용 혹은 부작용에 대해 『비명자들 3막』은 파사현정 연구소의 소장 '무진장(김대진 분)'을 통해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직관하면서 고통 받은 비명자와 그것을 이해하려는 자기 자신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잊으라는 삼법인, 즉 무상·고·무아로 비명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문제는 『비명자들 3막』의 해결책이 이론을 투박하게 문제 상황과 연결만 했을 뿐 정작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명자들 3막』에서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축은 크게 '과장(홍상용 분)'과 민홍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파사 방식과 '선재(사혜진 분)'와 '수진(장원경 분)' 등 파사현정 연구소의 현정 방식이다. 이 중 두 축에서 파사의 방식은 구체적으로 표현되나 이해라는 추상적인 관념의 구체화가 필요한 현정의 방식은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듯하다. 비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진해서 비명자들과 접촉하는 선재는 비명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접촉해 고통을 감내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명자들과 소통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추상적이다. 사성제에 기반한 현정이든 삼법인에 기반한 현정이든 선재가 비명자들에게 접촉해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 연출될 때 커다란 차이가 없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것과 직관해 받아들여 이해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즉, 선재가 비명자들과 접촉해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 전후로 선재가 내적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했는지 불분명하다. 비명자들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여 보현과 같은 비명자들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외적인 변화 외에 선재가 도달했다는 삼법인의 현정이 어떤 상태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