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에 초대해주시고 글을 쓸 기회를 주신 극단 고래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8년 홍대 산울림 소극장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본 바 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오래된 고목만이 서있는 조촐하면서 외로운 무대 위 블라미디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로만 이어지는 부조리극. 지루할 수 있는 공연이나 소극장이라는 환경에서 제목 그대로 고도라는 미지의 존재자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유예로 일관된 허무를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공감을 일으키는 공연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연장을 나서면서 그러한 공감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싫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 때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표면만이 아니라 이면까지 가득 채운 허무주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20대의 패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허무주의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혹은 둘 다 때문인지. 공연 자체는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음에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허무주의도 그 허무주의에 공감했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2018년 산울림 소극장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
그리고 5년이 흘러 극단 고래로부터 프레스콜이라는 이름으로 공연 초대를 받았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굴뚝을 기다리며>. 제목을 보자마자 2018년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봤던 시기가 떠오르면서 기대감이 확 차오르는 공연이었다. 모순이다. 공연은 좋았다고 생각한 것과 별개로 텍스트의 면면에 흐르는 허무주의와 그러한 허무주의를 타고 전달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밀어냈었는데 왜 제목을 보자마자 기대했을까? 2018년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서 사실은 허무주의에 홀렸던 것일까? 아니면 언제 끝날지 모를 실패의 연속인 취준 생활과 성공한다고 해서 안정되지 않을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에 위로를 찾고 싶었던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허무주의의 마력에 홀렸으며 실패와 불안에 대한 위로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현재를 살고 있는 불안한 우리를 허무로 위로해주는 극인 것이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것답게 허무주의에 기반한 부조리 희비극(?)이다. 공연은 굴뚝을 기다리는 나나(홍철희 분)와 누누(오찬혁 분)의 무의미한 것 같으면서도 철학적인 듯 들리는 대화와 행동으로 채워진다. 한 쪽 다리를 까딱거리며 걸어 나오는 나나와 누누의 대화는 재밌다. 다리가 아프다는 누누에게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의 마음으로 객체를 보는 것이기에 자신이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나나의 대사나 신발을 신고 있어서 다리가 아픈 것이니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말하며 신발을 벗기려고 하는 나나와 누누의 액션은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둘의 모습을 마냥 웃으며 보기에는 어느새 마음 한 켠이 불편해진다. 나나와 누누가 있는 장소가 굴뚝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한 때 매일 계속해서 보도가 되었던 2014년 쌍용자동차 노조의 굴뚝 농성. 노동 운동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대학생은 사건의 전후 사정은 자세히 알지 못한 채 그저 기업의 권위적이고 불공정한 대우로 노동자들이 과격하지만 그렇기에 해야 하는 농성을 하러 올라갔다고만 생각했다. 지금도 그 전후 사정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지만 쌍용자동차 노조의 굴뚝 농성을 알고 있는 이상 굴뚝 위에 있는 나나와 누누의 모습을 보면서 마냥 웃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필자 개인의 반응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일부분의 반응일 뿐이다. 사실 쌍용자동차 노조의 굴뚝 농성을 알지 못해도 나나와 누누의 모습을 보고 마냥 웃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 인터파크
나나와 누누는 아주 오랫동안 굴뚝에서 생활한 듯하다. 언제 어떤 일로 굴뚝 위로 올라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굴뚝 위에 둘이 함께 올라왔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명확하지 않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할 때 기억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자기 존재만이 아니라 미래의 자기 존재까지도 뒤흔드는 것이다. 바로 이 명확하지 않음에서부터 <굴뚝을 기다리며>의 불안은 시작한다. 언제 어떻게 왜 굴뚝에 올라왔는지 모르는 가운데 이름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파편화된 문장의 연속 속에서 나나와 누누라고, 말장난이나 말장난이라고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지칭할 뿐이다. 즉, 굴뚝 위 나나와 누누는 노동자였으며 지금은 파업 중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굴뚝 위로 올라온 인간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명확하지 않음이라는 불안이 온 몸으로 형상화되어 살아가는 아니 살아지고 있는 존재이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왜 굴뚝에 올라왔는지도 모른 채 그저 굴뚝이라는 존재를 굴뚝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련한 존재들의 대화는 웃음이 남에도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없다.
<굴뚝을 기다리며>은 존재만이 아니라 노동 즉, 실제적인 인간의 행위에서도 불안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기억이 필요하다면 물리적, 육체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다. 실체를 매만지고 변화하는 것을 몸의 감성에 기반해 경험하는 노동은 곧 인간이 지금 이 순간에 실체로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굴뚝을 기다리는 것이 나나와 누누에게는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노동일 수 있다. 70m 상공의 굴뚝으로 올라오며 느낀 차가운 금속의 사다리, 그 금속 사다리를 오르며 느낀 살을 에는 강풍, 시도때도 없이 붕 떠있다고 느껴 중력을 잊게 만드는 굴뚝의 발판 등. 이 모든 감성 경험을 통해 굴뚝을 기다리는 것을 단순히 '것'이라는 행동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물리적, 육체적으로 실체로서 자신을 인지하게 하는 노동이라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가운데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는 일이 노동인 나나와 누누에게 굴뚝은 노오픈 곳보다는 나아즌 곳이고 나아즌 곳보다는 노오픈 곳이라는 애매한 곳이다. 어디에서 언제 굴뚝이 올지도 모르는 가운데 기다림이라는 자신들의 실제 일이 행해지는 공간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그러한 공간 위에서 기다림 자체의 목적 조차도 알 수 없기에 더욱 불안을 느끼게 한다.
<굴뚝을 기다리며> 23.05.26 공연 커튼콜
이러한 노동의 불안을 통해 <굴뚝을 기다리며>는 다시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그들에게 혜성처럼 등장해 성자인 줄 알았던 굴뚝 청소부(사현명 분)도 365일 동안 쉬지 않고 굴뚝을 청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저 오늘 하루 일할 수 있고 그 일을 통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언제 이 일에서 잘릴지 몰라 불안한 것은 둘째치고 자신이 왜 굴뚝을 청소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굴뚝을 청소하지 않으면 굴뚝이 막혀 지구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청소는 하고 있는데 굴뚝 밑에서 뭘 태우는 공장이 있고 굴뚝으로는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하는 청소가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아슬아슬한 동앗줄이라는 사실만 인지한 채 간신히 삶을 영위한다. 자신이 왜 세계에 던져졌는지 사유하며 이를 실제적인 행위 즉, 구체적인 노동으로 연결할 때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현실은 먹고 자고 싸는 생명 유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노동일 뿐이다. 생명 유지 이외에 더 나은 삶을 고민할 수 없는 노동에서 인간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삶이라고 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지어 그러한 생명 유지를 위한 노동조차도 실수나 파업 등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거의 없고 매일 미소(김재환 분)를 지으며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에게 위협받는다면 대체 인간에게, 절대 다수에 가까운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에게 삶은 어떻게 가능하며 그러한 가능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노동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 속에서 <굴뚝을 기다리며>는 앞으로의 세대 혹은 현재의 청년 세대에 대해서도 질문을 한다. 약관의 나이까지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살고 있는 세대에게 경쟁은 공기처럼 너무나 익숙하다. 즉, 불안까지도 익숙하다. 경쟁은 언제나 낙오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이상은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가리지만 그러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 순간도 쉬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쇄신하고 발전해 어제보다 더 나은 '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는 총량이 있다. 언제까지 계속 쇄신과 발전을 이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잠시 멈추고 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청년 세대는 이소(김예람 분)처럼 가면을 쓴다. 쉬고 싶고 멈추고 싶으며 끝내는 좌절하고 싶은 자신을 매일 발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불안한 멋짐의 가면으로 가린다. 가면 이면의 자신은 경쟁자들에게 들켜서는 안 될 약점으로 생각하며. 그런데 대체 경쟁의 끝은 있는가? 지금의 경쟁에서 저 앞에 있는 1등은 누구지? 경쟁을 이겨내야 승자가 된다고 하는데 승자는 대체 어떤 모습이지?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는데 이 노력은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가 원한 승자는 대체 어떤 모습이지?
<굴뚝을 기다리며> 23.05.26. 커튼콜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굴뚝을 기다리며>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새로운 질문과 논의를 이끌어 내려는 듯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지금의 현재에 대해 질문하며 현재의 멈춤을 유도한다.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삶 즉, 살아있다는 것에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어쩌면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를 지금의 삶을 잠시 멈춘 채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듯하다.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고 있는 나나와 누누처럼 삶에 있으면서 삶에 있겠다고 불안해하고 노력하는 현실의 우리가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고 각자가 생각하는 삶에 대해 함께 얘기해보자고 말하는 듯하다. 멈춰야 한다는 말은 마치 지금까지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듯해 불안과 허무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실 불안하고 허무해야 한다. 지금 불안과 허무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노력을, 노동을, 삶을 학대하며 살아갈 것이다. 멈추고 함께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삶에 있음에도 삶에 있기 위해 지쳐 잠시 쉬고 싶은 자신은 애써 지운 채 아침부터 밤까지의 하루를 쪼개고 쪼개 계속 쇄신하려는 자신만 바라볼 뿐이다. 그렇기에 멈추자는 듯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굴뚝을 기다리며>의 불안과 허무는 위로가 된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주면서도 잠시 쉬면서 같이 얘기해보자고 하는 듯하기에.
5년 전 <고도를 기다리며>의 허무는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듯했다. 불안과 허무 속에서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불안과 허무에 공감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공연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실소와 폭소를 터뜨리면서도 무대 위 인물들에게서 엿보이는 불안과 허무가 현실의 '나'에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그러니 잠시만 다시 지금의 삶을 생각해보자고, 진짜 삶이란 게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하는 것에서 위로를 느낀다. 물론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함께 고찰할 수 있는 이들이 혹은 그러한 장이 있는지 혹은 있다고 해도 그들과 함께 고찰할 용기를 가지고 멈출 수 있는지 모르기에 안타깝고 그래서 허무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허무조차도 차분히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어딘가에 함께 멈춰 삶을 고찰할 수 있는 이들과 장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굴뚝을 기다리며>를 보고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싶어졌다. 불안과 허무에서 위로를 깊이 느끼며 현실과 삶의 진정을 다시 고찰하고 싶어졌다. 잠시 멈추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