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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Doh Aug 08. 2024

내 인생의 2000m

야생의 삶을 위해

  겨울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예고도없이 불쑥.

여전히 늦가을이라고 우기기엔 외형상 맞질않는다. 아침기온은 평균 1도에 머물거나 영하로 떨어질 때가 빈번해진다. 목덜미에서 한기가 느껴져 털목도리를 둘러야하고 가을용 코트로는 부족해 이제는 방한용 겨울 외투를 입어야한다. 평년기온보다 약 한달쯤 일찍 찾아온 겨울에 모두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에 이때라도 기다렸다는 듯 남편은 겨울 산행에 나서자는 제안을 했다. 겨울 산행은 다른 어떤 계절보다 특별한 묘미가 더하다는 말에 혼쾌히 동의했고 약 한달 후 쯤 가기로 날짜를 정해놓았다.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할 터 일반 등산용품들은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겨울 산행을 위한 장비들은 가지고 있지 않아 차분히 목록들을 적으며 준비해야했다.

산행시 눈이나 비에 젖었을 때 열손실로 인한 저체온증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울소재의 속옷이 필요했고 손가락이 잘 움직이는 겨울용 장갑 두켤레와 눈덮인 산을 오르고 내릴 때 미끄럼 방지를 위한 크렘폰(아이젠), 급경사나 얼음길에서 필수 안전 도구인 아이스 액스(피켈), 넘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헬멧까지 모두 구입했다. 눈이 발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는 게이터(스패츠)는 큰딸이 고등학교 때 사용하던 것이 있었다. 높은 산에 오르는 겨울 산행에는 이 모든 장비들을 철저하게 준비해 나서지 않으면 특히나 뉴질랜드 산에서  급변하는 날씨에 속수무책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신경을 써야할 준비사항이다.


  모든 준비는 마쳤고 산행 전날 커다란 배낭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배낭 맨 밑부분에는 가장 나중에 필요하거나 비상시 필요한 물품부터 담았다. 다운자켓과 여벌로 챙긴 방한장갑, 울양말, 배터리,  응급처치키트를 담은 주머니, 방풍자켓, 고어텍스 레인자켓을 넣고 크렘폰, 스패츠, 헬멧, 두번에 걸쳐 나눠먹을 간식 주머니를 차례대로 넣었다. 배낭 겉면의 맨 위쪽 작은 주머니에는 자주 바꿔서 사용해야하는 모자와 방한장갑, 휴지와 비상용 호루라기, 헤드라이트를 넣었다. 당일이 되어 이른 새벽에 만든 샌드위치를 가방 안에 넣고  따뜻한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배낭 옆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왼쪽에는 아이스 액스, 오른쪽에는 스틱을 매달고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다.  배낭의 무게는 무려 9kg에 육박했다.


  계획보다 한시간 늦어진 8시 30분에 출발해 한시간 후인 9시 30분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서쪽에 위치한 코로와이/톨레스  투석랜드 공원(Korowai/Torlesse Tussocklands Park)에 있는 1741m의 Foggy Peak 를 지나 톨레스 산맥의 최고점인 1998m의 Castle Hill peak다. 처음 등반을 앞두고 지난번 옥스포드 산행 후 두려움에 떨렸던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들었다. 약 두달여간 고강도 훈련을 한 이후로 다시 테스트해보는 기분에 기대감이 들었고 처음 도전해보는 겨울 산행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두달만에 다시 찾은 새로운 산과 마주한 반가움과 어떤 길에 직면할지 모를 두려움이 교차되는 조율되지않은 건반처럼 마음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차에 내리자마자 강하고 차가운 바람이 맞이했다. 재빠르게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 가파른 길은 온통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욕심을 내려놓고 가장 안전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중간 지점인 1500m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챙겨먹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대한 산맥들과 그 사이로 커다란 린든호수(Lake Lyndon)가 압도한다. 보통 이 곳에서 자신의 컨디션 상태나 날씨 상태를 고려해 산행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쾌적하고 맑은 날에 바람도 생각보다 강하지않아 우리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가기로 했다. 잠시 몸에 열량을 보충하고 또다시 경사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걷다보니 눈이 쌓인 지점에 다다라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을 내려 크램폰(아이젠)을 꺼내 신고 게이터(스패츠)도 착용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 집에서 연습삼아 착용해보았으나 세찬 바람에 장갑을 끼고서는 제대로 되지않아 맨 손으로 착용을 해야했고 생각보다 꽤나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단단히 하지않으면 오히려 커다란 낭패를 볼 거란 걸 알기에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하고 차분히 시행해 나갔다. 그렇게 난생 처음 등산화 위에 크렘폰을 착용하고 헬멧을 쓰고 오른손에는 아이스 액스를 들었다. 이것은 내 생전 꿈에도 그려보지않은 아주 낯선 모습이었다.

 


 


  얼어버린 빙판길이나 눈길을 천천히 밟으며 쉬지않고 걸었다. 걸으면서 바라본 오른쪽 능선은 내가 과연 이토록 급한 경사면을 걷고 있는 게 맞는가라는 착각에 빠질만큼 비현실적인 풍광과 마주했다.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에 사로잡혔다.

걷고 또 걸어 Foggy Peak에 다다랗다. 그 시각은 정확히 정오였다. 우리가 계획한 것은 마지막 최종 목적지인 Castle hill peak에 다다라야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한시간 늦어진 요인과 중간에 크램폰 신을 때 소요된 시간이 이유인 듯 싶다.

힘겹게 올라온 육체의 고난 끝에 맛보는 쾌적한 피로는 눈덮인 거대한 산들이 반겨주는 위로에 절로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Foggy Peak Craigieburn 산맥과 여러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난 웅장한 자연 앞에 숭고해지던 때였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듯 바로 코앞에서 기다리는 캐슬 힐 피크를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은 애타도록 조급해졌지만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멈춰야 할 때를 알고 또 가야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우선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점심을 먹기로 하고 잠시 쉬었다 1시까지만 걷다 되돌아오기로 결정을 했다. 겨울산은 해가 일찍 떨어지기 때문에 하산 시간이 4시 정도는 되어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보다 높은 곳인 포기 피크에 자리잡은 카페에서 즐기는 최고의 커피맛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최고의 맛집뷰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와 이른 새벽부터 싼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다시 가방을 둘러메고 앞으로 전진했다. 포기 피크에서 벗어나니 바로 급하강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갔고 또다시 급경사길을 올라서 드디어 능선에 들어섰다. 완만한 능선때문에  얼굴에 닿는 칼바람은 겨울 산행을 더욱 실감케 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걷다보니 1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고 우리는 그 지점에서 멈췄다. 그 지점은 정확히 최정상 거리의 156m 앞에 놓인 1842m 였다.  근거리의 최정상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다음날을 기약해야만했다. 처음 산행 시작점에서 만난 큰 개를 함께 동반한 부부를 포기 피크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들도 최정상까지는 가지 못하고 되돌아 오는 길이라는 말을 건내준 게 괜한 위로가 되기도 했다.

과묵하게 바라보고 있는 거대하고 넓은 품의 산에 안겨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평평한 능선 위에서의 풍경을 마음껏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아주 찐한 행복이 불현듯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10분정도 머물다 다시 재정비를 하고서는 하산하기 시작했다. 오를때보다 내려갈 때가 훨씬 강도가 쎄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발을 내딛였다. 앞서 걷는 남편을 뒤따라 걸었고 모든 잡념따윈 파고들 수 없는 오로지 자연과 독대하는 시간이었다. 이따금씩 만나는 등반객들과 짧게 나누는 인사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한발씩 한발씩 내딛는 등산화 소리와 ‘탁’, ‘탁’ 지면에 부딪혀 닿아 내는 스틱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뿐이다. 내 자신과 만나는 고독의 시간인 것이다. 비현실 속을 걸어가는것은 현실의 나였고 진정으로 나를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게 하고 있는 것이였다. 도전하고 쟁취하는 자만이 자연이 주는 최고의 만찬을 마음 껏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야생의 삶을.

두달여간 고강도의 훈련을 한 결과는 중간에 주저앉거나 하는 불상사가 전혀 일어나지않았던 하산으로 거짓없이 증명해줬다. 다리의 근력은 확연히 강해졌다. 어마무시한 급경사의 빙판길과 엄청난 돌들이 즐비한 길 위를 무사히 마쳤으니까. 하산 시간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정확히 3시 45분이었고 총 6시간의 고난도의 산행이었다. 한라산 정상과 맞먹는.


  한번도 가보지않은 낯선 길은 그 길에 들어서기 전이 가장 무섭고 두려운 법이다.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디뎌 천천히 걷다보면 내 발걸음의 궤적을 더하게 되고 결국은 그 무엇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없다는 걸 알게된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도전은 성공과 실패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즐기는 것에 만족하고 또 그렇기에 도전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내는 필수 조건이다. 인내는 오랜세월 살았다고해서 경험으로 취득되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위해서는 인내를 갖고 꾸준한 성실함을 갖춰야한다. 햇빛, 바람, 구름, 모든 자연의 색채로 채워진 진정한 마운틴 테라피인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겨울 산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과정들과 산 위에서 착용해보던 크램폰과 게이터 장착 하는법, 하산 하던 중 눈이 쌓인 경사로에서 미끄러지는 위급 상황시 사용해야하는 아이스 액스 대처법을 남편에게서 배우는 시간 또한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용기를 내어 처음 시작하게 해준 진정한 짜릿한 묘미의 겨울 산행과 인생 최고의 사진을 찍어준 남편에게 고맙다. 해보지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말로 표현못할 경이로움과 걷느라 예상도 못했던 내모습이 담긴 작품에.


 앞으로 7월 초 한겨울 또다시 눈앞에서 놓친 캐슬힐 피크를 향해 도전할 것이다.



Photo by Eunjoo Doh & Bushin 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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