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연대기, ‘찐’ 얼굴 찾기 2부: 정치 편

국민 위한 척 하는 정치인들, 뒤에선 ‘나 이득!’

by 슈퍼T

2부. 정치와 위선 — 국민 위한 척 하는 정치인들, 뒤에선 ‘나 이득!’

— 공공의 언어와 사적인 욕망 사이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말들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들을 들을 때 감동보다는 불신과 냉소를 먼저 떠올립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인의 언어가 단순히 이상과 도덕을 담은 선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욕과 사적 이익이라는 인간적 본능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연설, 공약, 정책 발표와 같은 공적 언어는 겉보기에는 공공선과 도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해관계, 개인적 야망, 집단적 이익이라는 현실적 욕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두 층위가 충돌할 때, 정치인은 도덕적 언어를 포장지로 삼아 자신의 사적 욕망을 감추게 됩니다. 즉, 위선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본능과 사회적 규범이 맞부딪치는 구조적 현상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메커니즘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관계의 심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연애나 직장, 친밀한 사회관계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숨기고 사회적 규범이나 상대방의 기대에 맞춰 행동합니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로, 권력욕과 사익이라는 본능을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는 포장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결국 정치인의 위선은 인간 본능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자,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필연적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정치인의 언어와 행동을 단순히 도덕적 판단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정치인을 쉽게 믿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 불신이 개인적 분노를 넘어 사회적 구조와 연결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위선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을 읽고, 우리 사회가 왜 반복적으로 같은 패턴을 경험하는지 통찰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원한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사회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원합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권력욕을 단순한 탐욕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생존과 번식의 필수 자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우두머리는 더 많은 먹이를 배분할 권한을 가졌고, 더 많은 짝을 선택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높은 지위는 곧 더 많은 자원, 더 안전한 보호망, 더 나은 짝, 더 넓은 영향력을 의미했습니다. 정치인은 현대 사회에서 이 권력을 획득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경멸합니다. “나는 권력을 원한다”라는 고백은 곧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낙인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정치인 중 누구도 “대통령이 되고 싶다, 권력을 쥐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 “정의를 실현하겠다” 같은 도덕적 언어로 욕망을 은폐합니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정치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입니다.

정치인은 권력욕을 숨기고, 도덕을 연기하며, “이상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세심하게 구축합니다. 연설문에는 ‘헌신’, ‘희생’, ‘공정’ 같은 단어가 반복되고, 미디어 속에서는 ‘서민적’이고 ‘겸손한’ 이미지가 강조됩니다. 그러나 그 무대 뒤에서는 선거 전략가와 홍보팀이 여론을 계산하고,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한 거래가 치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사실 평범한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나는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승진 경쟁을 벌이고, 인간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애쓰며, SNS에서 팔로워 수로 서열을 가늠합니다. “나는 권력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겸손한 자기 이미지이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위선적 언어입니다.

이처럼 권력욕은 본능이지만, 동시에 금기입니다. 드러내는 순간 욕망에 찌든 인간으로 낙인찍히고, 숨길 때만이 이상적 인간으로 인정받습니다. 정치인은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욕망을 도덕의 언어로 포장하는 데 가장 능숙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정치적 위선은 문화적 금기와 본능적 욕망의 타협 산물

정치적 위선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사회가 만들어낸 금기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타협의 산물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원합니다. 더 높은 지위는 더 많은 자원, 더 나은 짝, 더 넓은 영향력을 의미했고, 정치인은 현대 사회에서 이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위치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오래전부터 이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경멸해 왔습니다. “나는 권력을 원한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곧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낙인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도덕적 언어로 포장합니다.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겠습니다”라는 연설문 속 단어들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권력욕을 감추기 위한 정교한 전략입니다.

정치인은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고 있으며, 본능과 금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능숙합니다. 겉으로는 이상과 도덕을 말하지만, 그 뒤에서는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한 계산과 거래가 치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반 시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승진 경쟁을 벌이고, 인간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SNS에서 팔로워 수로 사회적 위치를 평가합니다. “나는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겸손한 말 속에는 사회적 승인과 자기 보호를 위한 위선이 숨어 있습니다.

결국 정치적 위선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사회적 금기 안에서 조절하고 포장하는 문화적 장치입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부패나 도덕적 실패로만 보지 않고,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교의 겸손 미덕

동아시아 유교 문화에서는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겼습니다. 유교 사상에서 이상적인 군자는 권력을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과 인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과 공익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벼슬길에 나설 때 자주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나를 불러 어쩔 수 없이 나간다.” 겉으로는 겸손한 자기 포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특권을 원했던 마음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권력욕을 솔직히 드러냈다면, 도덕적 정당성을 잃게 되고 사회적 비난과 배척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교의 겸손과 절제의 미덕은 단순한 윤리적 규범을 넘어, 권력욕을 사회적 언어 안에서 은폐하는 문화적 장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고 도덕과 겸손으로 포장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사회 구조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교 문화는 정치인과 관료,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권력욕을 숨기고 도덕적 이상을 내세우는 ‘위선적 언어’를 습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정치적 위선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권력의 욕망과 도덕적 포장의 긴장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봉사 윤리

서양에서도 기독교는 권력욕을 죄악으로 규정하며, 겸손과 섬김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지도자의 본질적 역할을 정의했습니다. 지도자는 권력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섬기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는 정치적 지도자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교황과 성직자들은 실제로는 권력과 영향력을 향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와 공식적 행위는 항상 봉사와 희생, 신앙과 신자의 안녕을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권력 확장과 정치적 영향력은 겉으로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한 봉사’라는 도덕적 언어로 포장되었고, 권력욕이라는 본능적 동기는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전통은 정치 지도자에게도 동일한 제약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권력을 원한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사회적, 종교적 금기 속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대신 봉사와 헌신이라는 언어로 욕망이 은폐되었습니다. 권력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도덕적 가치로 포장하는 것이 사회적 필수 조건이 된 것입니다.

결국 유교와 기독교 모두 권력욕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면서도 인간의 본능적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게 만들었고, 이를 겸손과 봉사라는 언어로 은폐하도록 구조화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적 위선과 권력욕의 은폐는 단순한 개인적 도덕 문제라기보다, 문화적·종교적 전통과 사회적 기대가 만들어낸 구조적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익 담론

근대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권력욕이 이전보다 더 강력한 금기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민의 위임이라는 원칙으로 정당화됩니다. 정치인은 자신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잠시 권한을 맡은 ‘대리자’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나는 권력이 필요하다” 혹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라는 발언은 곧바로 독재적 욕망이나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되며,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현대 정치에서 정치인은 언제나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라는 공익적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선거 연설과 공적 발언에서 개인적 욕망은 철저히 배제되고, 대신 겸손과 봉사의 언어로 포장됩니다. “국민이 부르면 나서겠다”는 표현이 허용되는 것은, 권력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사회적 금기를 우회하는 전략입니다.

이처럼 권력욕을 은폐하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구조는 동서양 문화 전반에 걸쳐 유사한 패턴을 보입니다. 유교의 겸손, 기독교의 봉사,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공익 담론 모두 권력욕을 드러내는 것을 부정하며, 정치인에게 도덕적 포장과 봉사의 언어를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인은 본능적 욕망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고, 도덕과 봉사의 언어로 욕망을 포장하는 것이 필수 전략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위선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과 금기 사이에서 형성된 사회적 타협이며, 인간이 생존과 사회적 승인 속에서 선택한 언어적 전략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이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며, 정치인의 겉과 속, 언어와 욕망 사이의 긴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선은 시스템이 만든다 — 착한 척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략

우리는 흔히 위선을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바라봅니다. “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사익을 챙긴다”라는 비난이 흔히 오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다릅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위선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생존 전략입니다. 사회는 늘 이상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조건 사이의 긴장 위에서 작동합니다. 정치인은 공익을 말해야 표를 얻습니다. 기업은 윤리를 강조해야 투자자와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인성과 도덕을 가르쳐야 교육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이익, 권력, 성과입니다.

이 모순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말은 도덕, 행동은 실리”라는 이중 전략을 채택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이상과 가치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현실적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위선, 기업의 윤리적 포장, 교육의 명분 강조 등 모든 형태의 위선은 개인의 기질이 아니라, 시스템이 강제하는 생존 기술입니다.

결국 위선은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산물입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고, 인정받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본능적 전략이자, 시스템과 현실이 만들어낸 필연적 선택입니다. 개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 사람이 처한 구조적 환경과 선택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주의 시스템 —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

현대 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보다는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문화로 흘러왔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과정에서 나타난 비윤리적 행위나 부정은 쉽게 묻히고, 기업이 높은 실적을 내면 내부의 불공정하거나 위험한 의사결정 역시 뒷전으로 밀립니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더 이상 ‘정책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이 실제로 정직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는지보다는, 투자자와 소비자가 바라보는 ‘신뢰할 만한 기업’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이 더 큰 보상을 가져다줍니다.

이처럼 진심보다 이미지를 잘 관리하는 사람이 보상받는 구조 속에서, 위선은 필연적으로 강화됩니다. 도덕적 포장은 단순히 미덕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며, 사회적 인정과 보상을 얻기 위한 필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결과만 중시하는 성과주의 사회는 개인의 욕망과 시스템의 요구를 맞물리게 하여, 위선이라는 문화적 현상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평판 경제 — 보여지는 나와 실제 나는 다르다

SNS와 언론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겉보기에 좋은 나’가 실제의 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정치인은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국민을 위한 진심’을 연출하고, 기업은 ESG 보고서를 화려하게 내세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노동 착취와 환경 파괴를 은폐합니다.

이제 평판이 곧 생존 조건이 된 사회에서, 위선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도덕적 이미지와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압력에서 비롯된 필연적 산물입니다.

이러한 평판 경제 속에서, 우리는 ‘진심보다 이미지가 더 큰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합니다. 정치인은 표와 권력을 위해, 기업은 투자와 소비자를 위해, 개인은 사회적 승인과 관계 유지를 위해 위선을 관리합니다. 결과적으로 위선은 사회적 전략이자 생존 기술로 자리 잡습니다.


권위주의적 문화 — 솔직함보다 안전함이 우선인 사회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체면과 눈치가 중요한 규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상사 앞에서 솔직하게 의견을 말하기보다, ‘적당히 맞추는 것’이 안전한 전략이 됩니다. 정치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솔직한 발언은 무례와 오만으로 낙인찍히지만, 체면과 예의를 중시하는 위선적 언어는 존중받습니다.

결국 위선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사회적 부적응을 피하기 위한 문화적 방어 장치로 기능합니다. 겉으로는 공익과 도덕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언어는 이러한 문화적 규범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권위주의적 문화는 솔직함보다 ‘안전함’을, 개인적 욕망보다 ‘사회적 승인’을 우선시하도록 만들며, 그 결과 위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됩니다.


역사는 이러한 구조적 위선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을 증명합니다. 조선 시대 양반은 겉으로는 청렴과 겸손을 설파했지만, 실제로는 세습적 특권과 사적 이익을 누렸습니다. 중세 교회는 자비와 절제를 강조했지만, 면죄부 판매와 성직 매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근대 국민국가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선언과 함께 탄생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가 공존했습니다.

결국 정치인은 위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구조 속에서 ‘위선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역사 속 사례들은 위선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본능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전략적 언어임을 보여줍니다.


심리학적 메커니즘 — 우리는 왜 그들의 위선을 받아들이는가

정치인의 위선은 싫지만, 우리는 번번이 속습니다. 아니, 속아주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첫째, 위선은 심리적 안정을 줍니다. 정치인이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거짓임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우리는 듣기를 원합니다. 사회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는 착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라도 듣는 편이 불편한 진실보다 덜 고통스럽습니다.

둘째, 인지 부조화의 작동입니다.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반된 믿음이 충돌할 때 불편함을 줄이려 합니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나는 부패한 정치인을 찍었다.” 이 두 명제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그래도 그 사람이 경제를 살릴 거야”라는 합리화를 만들어냅니다. 위선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이 불편한 긴장을 줄이기 위한 심리적 방어입니다.

셋째, 우리 자신도 위선적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겸손하면서 속으로는 경쟁하고, 윤리를 말하면서 실리를 선택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인이 솔직하게 “권력을 원한다”고 말하면 오히려 불편함을 느낍니다. “욕심이 많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사실 우리 자신도 그런 욕망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집단 심리의 압력입니다. 다수가 어떤 이미지를 믿으면, 개인은 의심을 접습니다. 여론에 맞서는 피로감은 너무 크고, 군중 속에서 혼자 ‘진실’을 외치는 일은 사회적 위험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선을 묵인하고, 심지어 공범이 됩니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정치적 판단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은 도덕적 언어로 감정을 자극하고, 유권자는 그 감정에 반응합니다.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타인을 더 잘 속이게 만드는 전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치인은 “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자신도 믿을수록 더 설득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유권자 역시 그 ‘믿는 태도’에 더 쉽게 감화됩니다.

결국 정치적 위선은 단순히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강제한 생존 전략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진화한 심리적 구조의 산물입니다.


위선의 반복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

위선의 반복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연애에서 “나는 외모보다 마음을 본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외모를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직장에서는 “성과보다 인성이 중요하다”라고 외치지만, 결국 승진과 보상은 성과를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치에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라고 선언하면서도 권력과 사익을 좇는 행태가 반복됩니다.

겉으로 보면 각각의 상황은 서로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동일한 패턴이 드러납니다. 본능과 사회적 규범, 욕망과 도덕, 진심과 말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해야 할 말’과 ‘진짜 하고 싶은 말’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결코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이 맞부딪히면서 만들어진 복합적 산물입니다.

따라서 정치인의 위선도 그들의 잘못이나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과 사회가 요구하는 연극의 배우일 뿐입니다. 그리고 시민 역시 이 연극을 바라보며 안도와 안정감을 얻기 위해 때로는 ‘속아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이 위선의 구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사회적 생존과 심리적 안정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위선의 시대, 진정성을 묻다

정치는 인간 욕망이 가장 복잡하고 정교하게 포장되는 무대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속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아주는 연기’를 함께하며, 이 구조 속에서 적응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위선이 만연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권력을 원한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원하며, 정치인은 이를 숨기기 위해 도덕적 언어와 봉사의 서사를 활용합니다.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정치적 행위는 보다 투명해지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둘째, 그 권력이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증명하는 정직함과 책임입니다. 단순히 권력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 어떤 구체적 행동과 실천을 할 것인지 명확히 보여야 합니다. 정치적 진정성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확인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집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인식과 성찰입니다. 시민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고, 정치적 위선의 구조를 이해할 때 사회적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시민이 깨어 있을수록 위선은 힘을 잃고, 정치인은 도덕적 포장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위선이 만연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모색해야 할 정치 언어는 솔직함과 책임, 그리고 성찰입니다. 정치인은 권력에 대한 솔직한 욕망과 그 사용에 대한 책임을 보여야 하고, 시민은 그 말과 행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위선의 사회에서 벗어나, 진정성이 회복되는 정치가 가능해집니다.


부록1: 통계로 본 유권자의 선택 — 정책보다 이미지

우리는 흔히 “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투표 현장은 말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미국의 Pew Research(2020) 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61%가 후보자의 정책보다 이미지와 말의 진정성을 더 중시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즉, 정책의 논리보다 후보자가 보여주는 ‘진심’과 ‘신뢰감’이 투표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KBS-입소스(2022) 조사에서 한국 유권자의 67.8%는 “정책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답했으며, 54.2%는 “정치인의 위선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는 유권자가 정치인의 도덕적 언어와 이미지, 즉 ‘겉모습’과 진정성을 실제 정책보다 우선적으로 평가한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정책 경쟁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서 핵심 게임은 이제 ‘누가 더 진정성 있어 보이는가’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위선은 그 게임의 기본 규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치인은 도덕적 언어와 봉사의 서사 속에 자신의 권력욕을 숨기고, 유권자는 그 겉모습과 진심의 신호를 해석하며 선택을 내립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위선의 구조를 인식하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시민이 많아질수록, 정치 문화는 점차 투명하고 건강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통계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위선의 현실과 동시에 그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울인 셈입니다.


부록2: 철학적 프레임에서 본 위선의 정치학


마키아벨리 ― 권력은 위선을 필요로 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주는 사자와 여우 둘 다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곧 권력 유지에는 노골적인 힘(사자)뿐 아니라, 속임수와 이미지(여우)가 필수라는 뜻입니다. 군주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권력을 지키는 것입니다. 위선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통찰이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공익을 말하면서도 권력을 탐하는 구조는 이미 마키아벨리가 예견한 권력의 논리 그 자체입니다.


니체 ― 도덕이라는 가면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이란 약자가 강자를 억누르기 위해 만든 장치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능을 억누르고 ‘선’과 ‘도덕’이라는 규범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위선으로 보았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권력욕을 “봉사”라는 언어로 포장합니다. 이는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의 전형입니다. 욕망을 부정하면서도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모순이 바로 정치적 위선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 ― 진정성과 정치의 공적 공간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란 공적 공간에서 ‘진정성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녀에게 정치의 본질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을 통해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정치는 이 진정성을 상실하고, ‘이미지 정치’와 ‘위선적 언어’가 지배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아렌트가 강조한 “공적 세계에서의 정직한 발화”는 지금 가장 결핍된 정치적 덕목이기도 합니다.


위선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본질을 냉정하게 분석하며, 정치에서 위선과 계산은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도덕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비판하며, 인간이 권력욕을 숨기고 도덕적 얼굴로 포장하는 구조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아렌트는 공적 세계에서 진정성 있는 정치가 가능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시민과 정치인 사이의 신뢰와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이 세 시선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제의식 속에서 나온 것 같지만,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위선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과제일까요.

역사는 위선이 권력 유지에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의 양반, 중세 교회, 근대 국민국가의 지도자들 모두 겉으로는 도덕과 정의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이익을 지키는 전략적 위선을 선택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정치인은 여전히 공익의 언어로 욕망을 포장하며, 유권자는 겉과 속을 구분하며 선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 사회는 점점 더 정치인의 위선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선거와 여론 조사, SNS와 언론을 통해 정치인은 시민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진정성 있는 언어와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권력을 원하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공동체적 가치와 연결시키는 용기.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 이후의 정치, 니체 이후의 도덕, 그리고 아렌트 이후의 공적 세계가 요청하는 새로운 정치 언어일 것입니다.

즉, 위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단순히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시민과 정치인 모두가 권력과 도덕, 욕망과 공익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진정성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위선 이후의 정치는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참여와 성찰 속에서 가능한 현실적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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