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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Aug 03. 2021

바구니

잊을 수 없는 갈등

  영민이와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양여중을 같이 졸업한 뒤 나는 건대부고, 영민이는 진선여고를 가면서 3년간 못 만났다. 1983년 3월,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주고받았고, 영민이는 영문과 나는 국어교육과여서 약속 없이 만나기는 어려웠다. 만나는 곳은 학생회관으로 정했다. 영민이와 나는 중3 때 같은 반이었고, 연합고사 치른 뒤에는, 한반 친구의 고향 여주로 2박 3일 같이 놀러갔을 만큼 친한 사이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만나고 보니, 피차 입시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만족감과 3년 만에 본 어색함이 교차했다. 학생회관은 1층은 매점, 2층은 서클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클룸을 돌아보자며 2층으로 올라갔다. 영민이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서클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한 달 전 명동성당 앞에서 대학생 선교 단체인 예수전도단의 한 이대생한테 붙들려서 입학하는 대로 서클룸을 찾기로 약속해 놓은 처지였다. 영민이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각 서클룸의 문에 써 붙여진 이름들을 읽어 가며 천천히 걸었다. 영민이가 멈춰 섰다. “야, 여기 괜찮을 거 같애.” ‘인간학회’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나는 예수전도단원으로, 영민이는 사회과학서를 읽고 토론하고 데모를 하는 인간학회원으로 대학생활을 해나갔다. 공강 시간에는 서클룸에 가고 오후에는 이런저런 이름의 예배에 참여하고 방학 때는 전도 여행을 가노라니 1학년 생활이 끝나 있었다. 과 친구는 사귀지 못했다. 신입생 환영회에 가니 선배 하나가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큰 통에 든 막걸리를 떠서 마시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똑같이 하래서 살금 빠져나온 뒤 과 모임을 가지 않았고, 그룹 미팅은 혹시나 해서 나갔다가 사람을 물건 고르듯 대하는 방식에 동의가 안 돼 한 번으로 마감했다. 영혼 성장에 주력하자 다짐했다. MT도 안 가고 고연전도 안 갔다. 영민이와는 문과대와 사범대를 잇는 오솔길에서 우연히 마주칠 뿐 따로 만나는 일은 점차 줄었다. 2학년 1학기의 어느 날 그 주 학교 신문을 펼치니 1면 전체에 영민이 얼굴 사진과 글이 실려 있었다. 사회변혁을 주제로 하는 글이었던 거 같은데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영민이가 친구여서 자랑스럽기보다는 열등감을 느꼈다. 영민이는 옳고 나는 비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학생회관 앞마당 잔디에서 서클 모임을 하고 있었다. 학생회관 2층에서 줄을 맨 바구니가 내려왔다. 확성기 소리도 들렸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하고 있는 학우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 모금을 하자는 소리였다. 바구니가 우리 자리에 왔다. 모임을 이끌던 선배가 그 바구니를 손으로 밀어냈다. 학생회관 안에는 며칠째 집에도 안 가고 밥도 못 먹어 가며 설립자의 친일 행위를 규탄하며 학원 정기를 바로잡자는 이들이 있었다. 영민이도 그 안에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을 외면하는 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데모 대열에 끼지 않는 거야 방식의 다양성이라 쳐도 굶는 데모꾼에게 밥은 먹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부끄러워졌다.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좇으려 과 선배들의 술자리에 끼지 않고 유행가를 듣지 않고 수업 시간 말고는 찬양과 예배로 채운 대학 생활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 모임에 끼기엔 늦어 있었고 딱히 옮겨 앉을 만한 서클도 없었다. 서클 나가는 횟수를 줄여 나가며 집과 학교만 오가며 그러저러 날을 보냈다.

 

  4학년 봄. 영민이가 날 보자고 했다. 집을 나왔다고 했다. 구로공단 쪽으로 위장취업을 나갈 건데 같이 활동할 동료와 거처가 확정될 때까지 잠시 머물 데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교회 동생 유경이한테 부탁했다. 유경이는 상고를 졸업하고 새엄마가 있는 세탁소 자기 집을 나와 성수동의 작은 회사 경리로 일하며 자양동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영민이는 유경이가 출근할 때 같이 나와서 건대 도서관에 있다가 내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저녁에 도서관으로 가면 나와 같이 유경의 방에 갔다. 일주일쯤 후에 영민이는 나에게 유경의 주민증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유경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영민이가 너 같은 노동자를 위해 일하려고 하는데 네 주민증이 필요하다고. 유경이는 주민증을 내줬다. 그 당시 유경이는 상사가 몸을 자꾸 만져서 괴롭다며 울곤 했었다. 영민이는 그걸로 위장취업 준비를 마치고 유경의 방을 떠났다.

 

  선택은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던가. 영민이가 버린 것은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이었고 내가 버린 것은 대학생 지식인의 의무였으려나. 그럼 내가 그걸 포기한 이유는 뭐였을까. 텔레비전에서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뉴스를 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격분했다. 제 부모 등골 빼서 빨갱이짓하는 놈들은 다 처넣어야 한다고 얼굴 힘줄이 섰다. 아버지 등골 빼서 대학생이 된 나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어서 ‘예수전도단’ 문을 밀었고, 영민이는 잘 나가는 공장 사장을 아버지로 둬서 ‘인간학회’ 문을 열었을까. 영민이는 하필 나한테 와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군말없이 그 손을 잡았다. 영민이는 한 번도 나한테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고 나는 한 번도 영민이한테 허무한 데서 돌이켜 영적인 데 관심을 가지라고 하지 않았다. 그 날 학생회관 2층의 서클룸들을 돌던 스무 살 두 여자 아이 중 하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내가 대학생활에서 포기한 걸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고 싶은데. 네가 포기한 건 또 뭐냐고도 물어 보고 싶은데. 영민이는 그 대답을 안 하려고 11년 전 봄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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