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식’과 ‘나’, ‘나’와 ‘일’ 간의 상관관계

'나는 직장생활에 실패했다' 5부

by 일재미

퇴사를 하고 난 직후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항상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 왔으니, 시간의 빈곤에서 벗어나면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할 줄 알았다. 책 한 권은 거뜬히 쓸 줄 알았는데, 책은 커녕 블로그에 동네 카페 후기 하나 조차 올리지 못했다.


당분간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8년을 일했으니, 8개월은 쉬어도 된다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쉬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불면증’


내 MBTI는 ENFP(재기 발랄한 활동가형)로, 원체 남들보다 에너지 레벨이 높은 사람인데, 낮에 이 왕성한 에너지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떤 날에는 해가 뜰 때까지 마음속으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헛짓거리를 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뜬 눈으로 양을 세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일’은 하기 싫었지만, 내 넘치는 에너지를 쏟아부을 ‘놀이’가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주식’이라는 놀이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내 퇴직금을 걸고…!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봤던 남자 친구는 완강히 반대했다.


“너, 그 돈 퇴직금이야. 퇴직금. 나는 너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다 아는데,,, 그게 어떤 돈인데…

그 돈으로 주식을 한다고? 꼭, 꼭 그래야겠어?...”


‘반대’라기보다는 개미군단 선배로서 ‘제발 주식엔 손대지 마’ 간절한 회유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것도 오른손은 미국 주식, 왼손은 국내 주식 더블로 손을 댔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낮에는 국내 주식, 밤에는 미국 주식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 주식은 치명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상하한가의 폭이 +_30% 이내에서 움직이는 국내 주식과 달리, 미국 주식의 세계는 상하방이 무한대로 열려 있었다. 개별종목들이 하루에 수십수백 퍼센트씩 널뛰기를 하는 주식의 세계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 만으로도 몹시 흥미진진했다.

나는 관심종목 리스트에 수백 개의 종목을 추가하고, 매일 밤마다 바다의 한가운데서 거친 파도의 울렁거림을 즐겼다.

마치 서핑에 진심인 서퍼처럼 눈앞에 파도를 한시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운동을 할 때에도 씻으러 들어갈 때에도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흡사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은 글로벌 국룰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주식을 시작한 첫 달 동안 한 달 월급에 가까운 수익을 실현했다.

회사를 다닐 땐,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손에 쥔 돈인데, 손가락 두번 움직여서(매수/매도 버튼) 월급만큼의 돈이 꽂히니 기분이 참 묘했다.


‘쓰흡.. 노동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 돈을 번 기쁨과 돈에 대한 허탈함이 공존하는…..


……아니, 솔직히, 그냥 좋았다. 너무 좋았다!

‘이 돈이 사이버 머니가 아니라, 실제 머니라니! 나 주식에 소질이 있나 봐. 아무래도 주식이 내 길인 것 같아.’


회사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정해진 월급을 받는 형태가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날이었다. 나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고급 수제 맥주로 성대한 축배를 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2월 말, 매일 ‘우상향’하는 줄만 알았던 주식 시장에 이상한 증후가 나타난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조… 정…

주식 입문 2개월 차로서, 처음 겪어보는 조정의 칼날은 꿈을 먹고 자라나던 (나의)성장주를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성층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갈 것 만 같던 아이들이 -10~20% 두세 번 뚜들겨 맞더니, 이내 완전히 반토막이 나버렸다.

내 돈은 순식간에 삭제되었고, 내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요동쳤다.


'이 정도면 일희일비가 아니라, 일희백비다…'


차라리 주식 쇼핑 말고 백화점 명품관 쇼핑이라도 했더라면, 쓸 만큼 쓰고 중고로 팔아도 반값 이상은 건졌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매일 아무 의미 없는 후회만 반복했다.


코로나 반사효과로 거품이 잔뜩 끼어 있던 주식시장은, 나와 같이 주식에 ‘ㅈ’자도 모르던 주식 비관론자들이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락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샀던 성장주 주식들이 완전히 폭락했다.)


시장의 하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큰손들이 이제 그만 조정을 멈춰 주기를, 하늘에서 엄청난 호재가 찾아와 주기를, 딱 한 번의 탈출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나는 3개월 간 두 번의 하락장을 경험한 후, 전업 주식러의 삶을 은퇴했다.

주식으로 한 달 치 월급을 벌었다며 ‘이 길이 내 길 이야.’ ‘노동의 가치란…씁쓸’ 섣부르게 떠들어대던 나의 오만함을 반성했다.


미국 주식은 수수료가 국내 주식보다 몇 배 비쌌는데, 매일 같이 뇌동매매를 실천한 덕분에 KB증권에만 약 100만 원에 가까운 미국 주식 수수료를 지불했다.

내 눈으로 ‘주식’ 놀이에 너무 많은 비용(수수료, 손절로 인한 원금 손실)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주식창을 자주 쳐다보고 삽질할 때보다, 아무것도 안 할 때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주식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주식은 당시의 버거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회사에서 퇴사당하고, ‘일하는 나’가 아닌 그냥 ‘나’로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무언가 에너지를 쏟아부을 새로운 ‘대상’이 필요했다.

때마침 ‘주식’이 눈에 들어왔고, 다행히 그 세계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줄 만큼 자극적이고 중독적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내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업 주식러로 살아온 3개월의 시간은 공교롭게도 내게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사유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주식이 정말 좋았더라면 거품장이든 하락장이든 매일 같이 주식 차트를 보고 트레이딩 하는 행위 자체에 재미를 느껴야 했는데, 나는 조정이 오면 주식이 꼴도 보기 싫었다.

예전에 한창 열심히 ‘일’을 할 때는, 이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재밌고 보람 있었는데, 주식은 달랐다.

나는 ‘주식’이 아니라 주식을 통해 얻는 ‘수익’이 좋았던 것이고, ‘주식’으로 인한 ‘손실’을 감당하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내 ‘일’은 실수하고 망쳤을 때 내 ‘손’으로, 내 '노력'으로 직접 결과를 바꿀 수 있었는데, ‘주식’은 달랐다.

시장 전체가 하락 곡선을 그릴 때나 매수한 종목들이 땅굴을 파고 지하실로 진입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 떠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나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어떤 형태로든 일하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었다.

‘일’이란 나에게 생계의 수단이자, 더 나아가 ‘나’로서 살게 해주는 자기표현의 행위였다.


나는 일에 몰입했을 때 내가 가진 재능과 열정의 최대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일하는 내 모습과 일을 통해 얻은 성취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내 안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일에 대한 '열정'이 스물스물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을 하려면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새로운 도전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지원서를 쓰고, 기다리고, 탈락하고, 다시 지원서를 쓰고, 기다리고, 탈락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낼 에너지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상반기였지만,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상반기가 끝나가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6월 1일에 ‘원티드’(구직 사이트) 어플을 켰다. (8년 전 취업준비를 할 때는 ‘사람인’이 대세였는데, 요즘은 잘 나가는 기업들이 모두 ‘원티드’를 통해 경력직 채용을 진행하는 것 같아 보였다.)

원티드에 올라온 여러 회사들의 채용공고들을 살펴보았다. 어릴 때처럼 돈이 궁했다면 ‘어디든 일단 들어가 보자’는 생각으로 하루에도 수십 통의 지원서를 제출하고 ‘제발 하나만 붙어라’ 기도했을 터이지만, 왠지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입사하고 퇴사할 때까지 ‘을’로 살아가는 게 직장인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예전처럼 열심히 일하고 소진되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과거에는 이 회사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알 수 있었다지만, 요즘은 여러 채널(유튜브/잡플래닛/각종 기사와 댓글 등)에서 기업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었고,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보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는 세상이 온 듯했다.


나는 과거 직장 생활의 실패 원인을 복기하며, 직장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들을 정리했다.

1. [산업의 성장성] 이 회사는 성장하는 산업에 해당되는가?
2. [회사의 성장성] 이 회사는 성장하는 회사인가?
혹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장은 없지만) 성장을 견인할 ‘기술’을 갖고 있는 회사인가?
3. [리더십/전략] 이 회사는 뛰어난 ‘경영진(리더)’과 ‘전략’이 있는 회사인가?
4. [조직문화] 이 회사는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회사인가?


일단 ‘성장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다 보니(열심히 일하고 소진되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내가 가고 싶은 회사들은 스타트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이직의 최종 Goal을 IT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으로 설정하고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네 가지 기준을 세운 후에는, 채용 공고에 올라온 회사가 기준에 부합하는 회사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네 가지 중 1~2번 ‘성장성’은 각종 기사, 구독 매체(DBR, 아웃스탠딩, 폴인 등)의 기사/칼럼을 읽으면 파악할 수 있었다.

3~4번의 리더십/전략/조직문화의 경우 경영진 인터뷰/구성원 인터뷰/잡플래닛의 구성원 익명 후기 등을 참고했다. (참고 : ‘잡플래닛’은 구성원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 대해 평점을 매기고, 솔직한 평가를 남길 수 있는 어플) 최근 1년 사이의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구성원이 회사의 경영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 회사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회사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지(보통은 점점 좋아지기보단, 점점 안 좋아지는 회사가 태반) 등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네 가지 기준에 부합한다고 판단된다면,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열심히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회사’라고 가정하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8-9년 전 첫 번째, 두 번째 직장을 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직 활동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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