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함

발뺌을 하는 이유

by 소풍보름

#1. 발뺌

발뺌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자기 입으로 해놓고, 막상 문제가 되면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라며 슬쩍 발을 뺀다. 잘되면 자기 조언 덕분, 안 되면 "네가 잘못 알아들은 거지"인 셈이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을 종종 겪는다. 한 번은 커뮤니케이션 오류로 ‘대형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뻔했는데, 다행히 휴대폰에 통화 녹음이 남아 있었다. 책임을 떠넘기던 직장상사 앞에서 그대로 녹취를 틀었다(지금 생각해도 속이 다 시원하다!). 분명히 본인이 지시한 내용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황당하다는 듯 그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는 끝까지 발뺌을 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그 일 이후로 내 회사생활은 조금 더 피곤해졌다. 임원실에 들어갈 때 나만 유독 휴대폰을 두고 들어가야 했다. 모든 대화를 녹음하는 파렴치한 취급을 받으며, 심할 땐 소지품 검사를 받기까지 했다. 자켓 상의를 열고 속주머니를 보여주며 “없는데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때 느꼈다. 꼿꼿하게, 또는 눈치 없이 살면, 때로는 혼자 유신시대를 살아가야 할 수도 있겠구나.


#2. 나의 비겁함

그런데 어제, 나도 발뺌을 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와, 나도 점점 직장상사가 되어가나 보다!), 내 말을 곡해한 후임이 임원에게 엉뚱한 보고를 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임원의 격앙된 반응, 나에게 이미 확인했다고 말하며 날 빤히 바라보는 후임의 표정, 그리고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다른 데를 바라보던 내 태도... 모든 장면이 마치 드라마처럼 머릿속에 재생된다.
아, 진짜... 그런 뜻 아니었단 말이야!

요즘 유난히 큰 사고를 치고 발뺌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오해든, 책임 회피든, 아니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든,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할 바엔 차라리 “제가 일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그래도 역시 회사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건 중요한 일이구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면 기어서라도 빠져나가는 게 직장인의 생존 기술인가 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억울하게 유탄을 맞는 사람은 대체 뭔가? '살아서 가족 품에 돌아가자'며 아군을 위험에 빠뜨리는 게 과연 전우애인가? 또 생각이 많아진다.


#3. 나도 너도, 적당한 비겁함은 모른 척 해주기

큰 피해가 아니라면, 적당히 눈감아 주는 것도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안다. 지금 저 사람이 어떤 구멍으로 어떻게 빠져나가고 있는지, 다들 보고는 있다. 굳이 그 자리에서 “왜 거기로 기어나가세요?”라고 외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피곤한 보복이 돌아올 수도 있고, 언젠가는 나도 그 개구멍으로 기어 나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결국 우리 모두, 비겁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집안의 아빠이자 엄마니까.

그냥 이렇게 생각하자.


“아씨... 그런 뜻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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