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에 필요한 풍화의 시간
"있잖아,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얼마인지 알아? 초속 5센티미터래"
벚꽃은 대략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피었다 진다고 한다. 일주일의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아쉬운 이별을 하는 것이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주인공 타카키와 아카리 역시 벚꽃처럼 아주 잠깐 아름다운 만남을 갖고,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로 천천히, 오랜 이별을 한다.
함께 중학교에 올라갈 줄 알았던 둘은, 아카리의 전학으로 먼 거리에서 편지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된다. 타카키는 아카리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함께 보냈던 날들을 추억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번에는 타카키가 더 먼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마지막이 될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타카키는 아카리가 사는 곳을 찾아가기로 한다. 초등학교에 헤어진 후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악의를 품고 내 위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폭설로 인해 기차는 계속 연착되고, 타카키는 예정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은 한 밤중이 되어서야 아카리와의 약속장소에 도착한다. 영화 속 타카키의 대사처럼, 시간은 악의를 품고 이들의 만남을 방해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던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은, 이 날을 정점으로 서서히 풍화된다.
꽃이 피어있는 시간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초속 5센티미터의 순간'도 아름다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남을 가지는 시간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벚꽃잎이 떨어지듯, 천천히 서로의 마음에서 정리하는 이별의 순간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씨네21 김혜리 기자가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사랑이 서서히 풍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줬다"고 말한 것 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중에도 이별의 마음은 함께 한다. 마음은 바위와 같아서, 단단한 것 같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람에 풍화되고 강물에 침식되기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서서히 이별을 하는 것이다. 즉, 초속 5센티미터는 이별의 속도, 아니면 헤어짐에 필요한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헤어짐 앞에 초연해질 수 있다.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일에 대한 사명감이나 즐거움, 호기심이 전혀 없는 상태이니 조직의 입장에서나 개인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말은 아닌 것 같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조용한 퇴사를 선택한 직원이, 입사하자마자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 처음부터 의욕 없이 회사 생활을 했을까? 아닐 것이다. 이 사람의 단단한 마음도, 어떤 이유에서든 풍화되어 지금에 다다랐을 것이다. '조용한 퇴사자'들이 먼저 겪는 현상은 대부분 '번 아웃'이다. 그리고 이런 번 아웃 뒤에 어떤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지 못하고 동기부여가 될만한 이벤트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번 아웃에 침식된 사람들, 그 중에 적절한 이직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용한 퇴사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중에도 '조용한 이별'을 하고, 직장을 다니는 중에도 '조용한 퇴사'를 한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풍화된 암석을 되돌려 놓을 수 없듯, 지친 마음도 다시 처음으로 돌려 놓기는 어렵다. 조직에 실망하고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을 닥달하거나 몰아세운다고 성과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조용한 퇴사자가 보이면, 일단 마음부터 달래주자. 얼마나 힘들면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더라도, 회사와 이별할 수 있는 마음의 시간은 줄 수 있다. 지칠대로 지치고 악에 받쳐 퇴사한 직원은, 결국 퇴사 후에도 회사와 갈등을 빚고 회사 평판에 악영항을 준다.
회사에 퇴사자가 생겼다. 이래저래 마음 상하는 일들로 힘들어하던 분이다. 평소 좋아하던 분이라 업무 시간에 함께 산책도 하고 커피도 한 잔 하며 고민을 나누던 사람이다. 내 마음을 많이도 달래주셨는데, 회사와 이별하는 그 분의 심정은 어떨까?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이제 접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열정적인 모습으로 출발하시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