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오래다녀 뭐하나.
아주 공감되는 고민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3번 사표를 썼다가 파쇄했다.
첫번째는 입사 후 3달 되던 날,
두번째는 7년차 때 너무 바쁜 부서에서 매일 두세번씩 큰소리로 혼날때,
세번째는 11년차 때 지점장님 지시를 어겼다고 불이익을 받았을 때.
그 사표들은 모두 사소한 일로 작성되고 사소한 일로 파쇄되었다.
첫번째 사표는 연수를 임신하고 지방발령을 받아 혼자 지방에 지내면서 입덧이 심하고 힘들어서 썼다. 그리고 사표를 든채 김밥천국을 갔는데, 학교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그 회사가면 너무 좋죠?"
'....응, 좋아, 너도 꼭 오렴'이라고 대답하고 회사로 돌아와 사표를 갈았다.
두번째 사표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핵심부서에 들어갔을 때였다. 매일 새벽 3~4시에 퇴근해도 일은 진척이 안됐고, 난 너무 못했다. 며칠 밤새운 일을 금요일에 제출하려는데 부팀장님한테 너무 많이 혼났다. 그저께 이미 오케이한 버젼인데 혼났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가자고 했다. 혼나고 점심먹는게 서러워서 혼자 안가고 사표나 만들었다. 점심가면서 내 표정을 본 동기가 먼저 식사에서 돌아와서 날 찾았다. 창고에서 울던 날 찾아서 말했다. '사표낼 용기를 가지고 오늘 조퇴하자. 일단 조퇴하고 사표내자.' 그래서 그 날 조퇴했다. 주말까지 쉬었다. 그리고 월요일에 출근해서 사표를 갈았다.
세번째 사표는 지점장님한테 찍혔을 때다. 단순히 지시를 어긴 것이 아니었다. 지점장님은 윗사람에게 잘하는 나를 콕 찝어 매우 민감한 일을 시켜놓고, 내가 해온 방향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화부터 냈다. 부지점장님과 팀장님은 내 방향을 지지했다. 지점장님을 설득하려다 우리 셋은 모두 찍혔다. 결국 부지점장님과 팀장님 모두 사표를 내고, 난 이직을 준비했다. 그러다 지점장님에 대한 본사 징계가 시작되었다. 지점장님 징계가 끝나기 전까지 회사를 떠나기 싫었다. 마침 이직의 길도 막혔다. 또 사표를 갈았다.
그렇게 12년 차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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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무실은 6년 전 다른 지점에서 만났던 Lee의 옆방이다.
Lee는 일처리가 꼼꼼하고 빠르다. 다만 다소 욱하는 성격이 있다. 6년전, Lee는 자신의 1지망 부서에 내가 배치된 배치표를 보고 내 사무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 날 이후 우린 서로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안보고 살려니까 신기하게도 또 만나게 되었다. 6년 후 이 지점에서 또 만난 것이다(나와 지점근무를 두번 같이한 동료는 Lee뿐이다). 우린 이 지점에서도 최대한 멀리하며 지냈는데, 어쩌다보니 같은 팀에 배치되어 옆사무실을 쓰고 있다.
같은 팀인데도 말을 안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오늘 Lee가 갑자기 사내메신저로 쪽지를 보냈다.
'어제 그 CASE 고민하던데, 책 필요함?'
난 잠시 쪽지를 해석하지 못해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난 그 책이 필요하다!
바로 옆방으로 건너갔다.
"책 있어요?"
"(직접 나타날건 뭐람이라는 표정) 본점에서 몇개 받았어, 약간 도움되더라"
"잘 읽을게요"
"응"
6년 만에 Lee와 나눈 대화다.
늘상 하던 일을 하던 오늘의 일상은 조금 의미있어졌다.
직장을 오래다녀서 옛 동료이자 현 동료와 그냥 어느 날 책을 건네고 받을 기회가 생겼다.
책을 들고 있다가- 요새 힘들다고 소문난 후배에게 연락해서 점심약속을 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 사표를 쓰게도 하고 사표를 지우게도 하니까,
오래다니다보면 좋은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후배에게 조금 분위기있는 점심이 혹시 사소한 것이 될 수 있으려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