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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서 Nov 06. 2021

사랑의 다른 말

<어린 왕자>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약속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해진다는 말은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로코 드라마에서 여주가 남주를 생각하며 쓰는 일기 따위에 나올 법한 말이죠. 로맨틱한 탓일까요, 실제로 이 말은 굉장히 유명해져 SNS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과장을 보태자면 어린 왕자는 몰라도 이 말은 알 정도입니다.


놀랍게도 이 말은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짐을 설명하며 한 말입니다. 왕자는 여우에게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냐 묻습니다. 보통 '길들이다'라는 단어는 사람보다 동물이나 사물에 쓰이는 말입니다. 강아지를 길들이다연장을 길들이다 처럼 말이죠. 그런데 여우는 '길들이다'의 뜻을 굉장히 애틋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길들이다'의 정의는 어떤 일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여우는 길들임을 도구를 다루거나 먹이를 주는 일에 한정 짓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일까지도 포함시키죠.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게 되고, 느껴지는 숨소리만으로 대상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길들여짐은 사랑의 다른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자 생텍쥐페리의 삶은 어딘가 낭만적인 이 동화의 끝 맛을 더욱 길게 남깁니다. 평생을 하늘에서 조종사로서 살던 생텍쥐페리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글도 끊임없이 퍼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의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도 비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비행은 삶의 일부였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생텍쥐페리는 많은 나이 탓에 비행을 금지당합니다. 그는 마지막 다섯 번의 비행을 허가받습니다. 그 다섯 번의 비행 속에서 그는 행방불명됩니다. 독일군 정찰기에 격추당했을 거라는 추측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마지막 비행을 나섰을까요?





마지막으로 옮긴이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바칩니다. 궁색하기까지 한 변명과 미안함을 담아서 말이죠. 나이가 들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자신에게 던지는 자조이자 성찰입니다.


<어린 왕자>를 번역하며 옮긴이 황현산 평론가 역시 이런저런 고민을 합니다. 원문 그대로 옮기는 게 나을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친절한 번역이 나을지 고심합니다. 그의 결정은 이렇습니다. 책 말미 옮긴이의 후기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중략) 그러나 무리하게 자연스럽게 옮기지도 말고, 어린이들의 독서력을 얕잡아 보지도 말고, 저자가 썼던 대로 옮겨 오면 어린이들의 세계에 마침내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 번역은 때때로 <엄숙하게> 말할 줄 아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이의 가능성과 진지함을 믿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 겁니다. 언젠가 이 동화를 다시 펼쳐보게 될 어린이에게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 것입니다. 참 현명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다 보면 익숙한 비유와 우화가 마구 쏟아집니다. 너무도 유명한 모자 삼킨 보아뱀부터 바오바브 나무, 장미꽃과 여우까지... 아는 게 많아서 그런가, 읽는 맛이 있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들 하지만 은유나 함의 따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냥 훌륭한 동화책이라 말해도 정확한 표현인 듯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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