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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Jan 28. 2022

내가 만난 사람들

04.

 




   올해로 스물아홉 살이 된 나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는 이 사실이 결점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상해서, 누군가를 사귀기에 무난한 성격도 외모도 아니어서 연애를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자면, 지금도 그런 생각이 빼꼼히 고개를 들 때가 있다. 영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거짓말은 아니지만, 연애를 몇 번 해봤냐는 질문에 매번 “몇 번 안 해봤어요.”라는 대답으로 응수하는 것은 한 번도 연애를 안 해봤다는 사실이 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과 나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었을 텐데, 그 사람에게 굳이 편견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사지 멀쩡한 보통의 사람이 왜 연애 한 번 못해봤지? 무슨 문제가 있나?”


   물론 내 기우일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연애 같은 것은 개인의 선택 정도로 간주된다. 내 가까운 친구들 중에서도 연애를 내 시간과 돈을 꽤나 할애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관계로 여기는 경우가 제법이다. 그 모든 비용을 나에게 투자한다면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얼마나 휴식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그것도 맞는 소리지.

 그런 것과 별개로 나 역시 그냥 순수하게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애를 하면 어떨까? 한 사람과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을까? 연이어 터지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그중에서도 연인 간 비율이 높은 것을 생각하며 이내 그 생각을 내 망상쯤으로 치부하고 접어두곤 하지만, 신문 사회면을 보지 않아도 난 그저 내 과거를 짚어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만나봤던 어떤 남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오랜 시간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긁어 부스럼이고, 내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하지만, 잘못한 건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적는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나는 당시에도 지금도 힙합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국내 힙합은 거의 듣지 않지만, 그때는 국내 힙합을 주로 보고 듣고 즐겼다. 지금은 거의 활동하지 않는 ‘배치기’라는 팀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멤버들이 게시글에 댓글을 달아줘 가입하게 됐는데, 차츰 그것보다는 카페의 커뮤니티 활동이 즐거워졌다. 소심했던 탓에 정모 같은 것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들 사이에서 함께 소통하면서 힙합만큼이나 사람을 사귀는 즐거움을 만끽했었다. 지금은 모두 연락이 끊겼지만 종종 펜팔을 주고받던 언니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카페도 있었다. 정확히 어떤 카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정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했던 카페는 아니었다. 회원들이 올리는 데모 파일을 듣고 댓글을 남기고, 그래피티 하는 회원이 올린 작업물을 구경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힙합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본인 콘텐츠에 대한 피드백도 주고받고, 소소하게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던 카페였던 것 같다. 그중, 스물일곱 살의 그 사람도 있었다. 난 당시 열네 살이었다. 변명이 아니고, 나는 정말 어렸다. 그런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게 정상적인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 뭐하냐는 친구의 말에 어떤 오빠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전했다. 실제로 나는 그 사람을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친구에겐 그 사람의 실재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오빠가 아니라고 할 테니까. 너는 아저씨를 만나고 있다고 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잘못이라는 생각은 못했던 건,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우쭐했다. 유치한 또래 남학생들이 아니라 어른을 만나는 내가 정말로 어른이 된 것 마냥. 그런데도 난 속에선 나도 모르는 채로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눈치챘다. 그저 어떤 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댔던 그 모순의 이유를 이제는 안다. 난 만나기 전부터 그 만남이 무서웠지만, 그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떨림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언저리에 신촌에서 만났다. 난 서울에 혼자 가본 적도 그때가 거의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어른답게 보이고 싶어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짧은 체크무늬 치마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과 나는 영화를 봤다. 불이 꺼지자 그 사람은 나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계속 손에 땀이 났는데, 난 그것 역시 떨려서라고 생각했다. 영화에 영 집중이 안 되고 계속 긴장이 됐다. 그 사람은 잡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떨려하는 나를 귀여워하더니 중반부부터 곯아떨어졌다.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영화를 코로 보는지 눈으로 보는지도 모른 채 영화가 끝났고, 그 사람은 나를 크리스피 도넛 가게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도넛을 먹었고, 헤어졌다.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 내가 도넛을 거의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헤어지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돌아와 접속한 카페에서는 나와 그 사람의 만남이 작은 이슈가 되어 있었다. 그래, 그 카페. 그 카페가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을 했었다. 나와 그 사람의 만남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나와 서른이 다 돼가는 그 사람의 만남이 이성 간의 만남이어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나는 신촌에서 나를 대하는 그를 보며, 정말 내가 성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별로 이상한 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나는 어딘가 불안했다. 카페의 그 사람과 특히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물었다. 형, 오늘 어땠어? 뭐 했어? 그 사람은 답했다. 아무것도 못했어~ 애가 너무 떨어서.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떨지 않았다면? 그럼 그 사람은 나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그 이후로 그 카페를 향한 발길을 바로 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만남을 기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만남과 그 이후 그 모든 게시글과 반응 이후로 적어도 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종료됐다. 나는 긴밀한 주제로 대화를 하던 두 명의 친구에게 비밀스럽게 고백한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못 했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할까 봐 무서웠다. 당연히 친구들은 경악했고, 모든 잘못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했다. 친구들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말하든 나 역시 이제는 안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피해자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열네 살짜리에게 무언가를 하려고 만나는 스물일곱은 어떤 말을 붙여도 정상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또 한 사람 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돛단배’ 같은 익명성 채팅이 유행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겁 없고, 경계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인지 놀란다. 상대는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남자였다. 그때는 채팅을 주고받다 서로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카카오톡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카카오톡으로 넘어와 그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불편함은 시작된다. 상대는 스스럼없이 나에게 성희롱을 했다. 프로필 사진을 쭉 훑어봤는지 노출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진들을 보며 몸매 품평부터 시작해서, 내가 성관계를 맺어봤는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없다고 말하자 첫 관계를 맺으면 많이 울 것 같다는 둥 첫 상대가 자신이라는 가정하에 별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너무나도 명백한 성희롱에 놀라웠다. 얼마 안 가 나는 대화를 끊었고, 차단했다. 생각해보면 무섭다. 서로의 지역이 다 노출되었고, 그 사람과 나의 지역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가끔씩 들어갔던 익명성 채팅에서는 당연히 카카오톡은 물론 개인적인 정보가 조금이라도 노출될 가능성이 보이면 피했다. 그마저도 흥미가 떨어져 금방 그만뒀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사람 같은 직접적인 성희롱은 아닐지라도 당장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이 많은 곳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서 진지한 만남을 상상했던 잠깐의 시간들은 정말 상상 그 자체였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 아닌 곳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하나같이 그랬다.


   그 외에도 별의별 남자들이 다 있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무기로 노출이 있는 사진을 요구하던 만화가. 난 그때도 민소매 차림으로 팔과 목이 드러나는 사진을 보냈었다. 이후 그 사람의 논란이 터지고, 기사화가 되자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피해 사실을 알리면,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겠다고 했고, 나 역시 그때 사과를 받아냈던 기억이 있다. 기사로 안 사실이지만, 내가 보낸 사진은 정말 노출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내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웃는 이모티콘까지 보내며 고맙다고 했지만, 피해자들이 알린 사실은 경악스러웠다.


   또 누가 있었더라···. 함께 술을 마시던 한 남자 애가 나에게 입을 맞추던 바로 그 순간에 끊겼던 필름이 돌아왔던 때도 있었다. 그때, 제정신이던 사람은 내 친구 단 한 명이었는데 그 친구마저 나와 같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그 남자 애와 무리들은 모두 체육을 전공하던 애들이었으니, 그 남자 애들이 덜 취했고, 그럴 마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면, 물리적으로 우리가 저항한다고 했어도 그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취한 나 때문에 친구는 본인의 집까지 노출 시켰다. 두고 두고 그 친구에게 사과하는 일이었다.


   이 기억들을 쭉 상기시키다 보니 나는 정말로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런 비정상적인 루트를 연이어 밟고, 나를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면서까지. 나는 정말로 순진했다. 지금 보면 투명하게 보이는 모든 과정과 피의자들의 속마음까지도 그때는 전혀 몰랐고, 또 모른 척을 했다. 호감 앞에서는 이성이 작동하지 않아서였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그랬다. 탓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바로 저 사람들이 그걸 믿게 만들었다.


   내가 언젠가 유명해진다면,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 사실을 알게 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까 봐 두려워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왜 그렇게 헤프게 행동했냐고, 그러게 처신을 똑바로 하지 그랬냐고.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았다. 왜 남자 탓만 하냐고, 네가 그 상황을 인지 못 했을 리 없는데 동조했다면 네 탓도 있는 거 아니냐고, 자발적으로 그랬으니 네 의지 아녔냐고. 글을 쓰면서도, 나는 내 탓을 계속했다. 어쩌면 그렇게 멍청했을까. 인정하자면,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뿐이다.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내가 스물일곱 살의 남성을 만난 것, 내가 성인인 만화가에게 내 사진을 보낸 것, 내가 익명 채팅방에서 내 개인정보를 넘긴 것, 내가 모르는 남성과 술을 마신 것. 그게 내가 성희롱을 당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들이 내 순진함을 이용했다고, 그렇게 그들 탓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솔직히 이 상황에서 누구를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순히 그들에게 응한 나일까? 아니면, 그 비정상을 당연하게 강요했던 그들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요구했던 틀 안에서 나도 자유롭지 않다. 애초에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됐잖아, 라는 속마음 때문에 난 아주 오랫동안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애초에 나를 여자로 봤으면 안 됐잖아. 나는 미성년자였는데. 그 남자는 애초에 그런 사진을 보내라고 하면 안 됐잖아. 나는 그냥 그 사람의 그림을 좋아하던 팬이었는데. 그 남자는 애초에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잖아. 그런 말 자체가 성희롱인데. 그 남자는 술을 마셨다고 해서 나에게 키스했으면 안 됐잖아. 나는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이 말들이 자꾸만 나를 북돋아주었다. 잘못한 건 네가 아냐, 그 사람들이지.


   내가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면, 신문 사회면을 보지 않아도 난 그저 내 과거를 짚어보면 그만이었다. 거기에 바로 신문 사회면에 나오지 않았던 무수한 기사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고, 모든 남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모든 남자들을 쓰레기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이제는 인정하고 싶다. 나는 연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고.


   모든 남성이 저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의자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남성도 있을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에 대한 환상을 안고 살아가기엔 이 사실 이외에도 내게 벌어졌던 무수한 성희롱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어졌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도 그런 일 있었어,라고 말하던 친구들. 글쎄, 그들 논리라면 내 친구들 모두 헤픈 여성인 걸까? 내 친구들이 성희롱의 여지를 줬기 때문에?


   나도 마음 편하게 환상을 안고 살아가고 싶다. 그저 너무 철이 안 들었다는 장난 같은 잔소리를 듣고도 미소를 지을 만큼. 이 모든 사건을 겪은 나는 우습게도 아직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꾸는데, 도무지 그 장르는 변할 생각이 없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다. 그런 환상을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용서한 뒤에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바로 세워진 것만 같다. 잘못은 내게 없고, 그들에게 있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어그러진 환상을 안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영화 같은 사랑 따위는 괜찮다. 변하지 않는 장르도 상관없다. 이미 나는 꽤 멋진 영화 속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어떤 악당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 연출도, 대본도, 주인공도 나인 이 영화 속에서 나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유일무이함이 내 평화를 만든다. 혼자 있는 삶도 아주 많이 괜찮다. 나는 더 많이 괜찮아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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