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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세윤 Jan 19. 2022

돌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

반려돌과 외로움

나는 어릴 적에 예능프로를 많이 봤다. 내 세대의 투톱 예능프로라고 하면 토요일의 무한도전과 일요일의 1박 2일이었다. 그중 1박 2일의 어느 한 편에서 ‘포유류만이 고통을 느끼는가? 아니면 모든 생물이 고통을 느끼는가’라는 주제가 나왔던 적이 있다. 모든 생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답은 포유류만이 아닌 모든 생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강호동과 이승기만 중국 음식을 못 먹는 장면이 연출되어 웃음을 만들어냈고, 그 후 멤버들이 하룻밤을 묵기 위해 이외수 선생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물어봤을 때 이외수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을 받을 대상들은 모두 고통을 느낀다. 인간들이 그저 인간의 방식으로 고통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뿐이지 하물며 돌도 고통을 느낀다.”라고 말이다. 

    

 얼마 전 나는 ‘반려돌’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그 단어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기이함이었지만 끝끝내 도달한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비록 겨우 20대 후반의 나이지만 나 역시 확연히 느낀다. 예전에 비하여 정말 많은 사람들이(나이와 세대에 불문하고) ‘관계’에 피로함과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5포 세대, 7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한 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고, 특히나 많은 2030 세대들이 자신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 ‘관계 맺음’을 사치로 느낀다. 이는 앞서 말한 현대에서의 개인들이 가지는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 나오는,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것마저도 빠듯한 삶에서 야기된 것일 수도 있지만, 관계의 감정적인 피로감의 증폭 역시도 존재한다. 기존에 친밀하게 맺고 있던(혹은 친밀하다 생각했던) 관계에서 자신이 주는 감정에 비해 돌려받지 못한다는 허무함, 그와 동시에 기대감에 비례한 만큼 다가오는 실망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대한 시간과 재화 소비의 부담감 등에 관계 맺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세태에 반려견과 반려묘 등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은 관계는 이러한 것을 느끼는 세대들에게 좋은 방법이었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이유만으로 반려동물들을 키우는 것만은 아닐 것이지만 말이다) 이 방법은 인간이 관계 맺음으로 가지는 순기능을 많이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반려동물들을 기르거나, 함께 살아가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고(감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버리거나 자신감을 상실하였지만, 여전히 관계 맺음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안처럼 나타난 방법이 바로 돌을 기르는 것이다. 사실 위에 나온 어떤 이유로도 부담과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로움의 동물이며, 언제나 사랑과 공감을 갈구한다.  

   

 이외수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고통을 받는 돌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 반려돌이라는 말은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글을 쓰고, 철학을 전공한 내 입장에서는 어쩌면 꽤 의미 있게 다가오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쎄.. 내가 아직 너무 의식이 닫혀 있는 사람일까. 무생물을 ‘기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그 기이함은 곧 안타까움으로 느껴졌다.      


 무생물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감정이 현대사회의 외로움이고 우리는 외로움 그 자체의 동물이다. 지금은 그런 사회이다. 나와 아무 추억도, 기억도, 인연도 없는, 심지어 생물도 아닌 것에 반려라는 이름을 붙이면서까지 키우며 우리는 외로움을 위로하는 가장 표상적인 방법인 ‘관계 맺음’을 시도한다. 외로움, 그리고 사랑, 공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공존한다. 자신의 외로움에 공감을 원하며 사랑을 주고받길 원하는 사람들. 심지어 돌에마저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반려돌을 기르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괴인 취급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누구도 비난하고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결국 인간이기에, 그 외로움 그 자체의 동물이기에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 나조차도 관계와 관계 맺음에 부담스러워하고 피로해하면서도, 누구보다도 그 방식과 결과물을 원한다. 단지 모두가 잘은 몰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감정과 욕구를 해소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반려돌을 기르는 것 역시도 이제는 그 방법 중 하나가 된 것일 뿐이다.      


 내가 제일 많이 하고 다니는 말이 하나가 있다. 

‘개인의 행복 그 이상이 어디 있어.’     


 단지 내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건 안타까움이다. 그 감정들에 이끌려가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우리가 태어나서 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외로움 그 자체라는 것.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내가 나를 동정하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외로움. 그 외로운 단어 그 자체로 태어나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이다. 당신은 무엇으로 그 외로움을 위로하고 있는가? 무엇에게 사랑을 주고 무엇에게 사랑을 받으며, 무엇의 공감을 원하는가? 0초부터 1초까지, 그 모든 시간들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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