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 초저녁. 가로등 불빛을 따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길을 걷고 있었고 길게이어진 길의 양쪽으론 제법 키가 큰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로의 간격을 만들며 서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 중 어느 커플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자가 물었다.
"오빠, 이거 무슨 나무야?"
"벚꽃나무네."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
"봄에 꽃 핀 걸 봤거든."
"아아, 여기 벚꽃길이야? 내년 봄에 벚꽃 피면 너무 예쁘겠다. 그때 여기 또 오자."
둘의 대화를 듣자 올봄 이 길에서 벚꽃을 본 날이 떠올랐다.
여럿이 봄놀이를 나온 노인들,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 아기와 산책을 나온 신혼부부 그 외 알 수 없는 친밀한 사이들.그날 그들의 표정은 그늘 없이 맑았다. 며칠이 지나면 벚꽃은 약속도 없이 졌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랜동안 계절을 잊지 않고 꽃을 피워 온 나무를 신뢰하며 내년을 기약했고 꽃이 없어도 벚꽃나무인 걸 알아보았다.
어느 한낮, 실연 후 2인용 벤치에 마른 고목처럼 앉아 있던 날에 옆자리에 한 할머니가 다가와 앉았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나무에 조롱조롱 달린 잎들을 보고 낙엽이 뒹구는 모습까지 본 뒤 마지막으로 남은 나를 쳐다보았다.
무연한 시선으로 동요도 없이 빤히 보더니 그랬다.
"그래도 사랑나무야." 했다.
"뭐가요?" 묻자
네가 사랑나무지 누굴 말하겠냐며 나중에 또 사랑이 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가 봤어요? 사랑이 피었는지."
"보긴 뭘. 이미 잃은 얼굴을 봤으니 그전에 사랑이 있다 진 걸 아는 거지."
"그렇다 해도 사랑이 다시 필 건 어떻게 알죠."
"사랑이 원래 그런 거니까. 그건 네가 피워내는 게 아냐. 사랑은 제 속성대로 추동하는 에너지가 힘을 뻗치듯 어느 결에 피어버리는 거거든."
"언제 까지나요?"
"그래, 살아있는 내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 한켠이 웅웅 울렸다. 제 이야기하는 걸 엿들은 사랑의 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