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사전에 따르면 상처라는 명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상처1은 몸을 다쳐서 부상을 입은 자리이고, 상처2는 피해를 입은 흔적 따위를 의미한다. 비교해보자면 상처1이 눈으로 관찰 가능한 손상된 신체 부위라면, 상처2는 피해에서 비롯된 어떠한 느낌이나 이후에 부가되는 아픔까지도 포함하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사실 상처하면 떠오르는,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아픔과 두려움 혹은 상처를 입기 싫다는 적극적인 의지들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상처 자체와 동일선상에 놓인 개념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상처에서 비롯된 어떠한 느낌을 상처와 한데 묶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상처2의 의미대로- 엄밀히 말하자면 상처를 제외한 부수적인 그것들은 콤플렉스에 가까울 것이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특성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감정, 태도를 지칭하는,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그 상처라는 것이 개인의 존엄성을 말살할 정도의 반인륜적인 트라우마에 해당한다면 개인에게 남은 흔적은 PTSD가 될 것이며 이 경우에는 의학적인 치료가 시급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언행으로 인해 소위 마상을 경험한다. 예컨대 배가 조금 나온 사람에게 누군가가 웃으며 임산부 같다고 말을 했다고 치자. 그동안 당사자가 자신의 배를 어떻게 여겼든지 간에, 임산부 같다는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당사자는 살이 찌는 것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게 되고, 살이 찌는 것에 대한 혐오감의 정서를 내재화하게 된다. 상처가 남긴 흔적이 당사자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로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은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당사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상처는 언제고 피를 흘린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살이 찐 것 자체는 어떠한 판단이 필요 없는 개인의 특성에 불과한 것이고, 상처 입는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살이 쪄서가 아니라 살이 찐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를 학습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나 개인의 가치 판단이나 감정, 태도는 언제든 (어떠한 계기로 인해) 변할 수 있다. 심지어는 (개인이 스스로) 바꿀 수도 있다.
얼마 전 내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상처 받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친구의 말은 대단한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서사를 쓰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처가 두려운 나머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언행을 더이상 이어나가지 않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의미의 위기>에서 김인환 선생님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오해와 갈등을 경험하며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친구의 말은 결국 자기를 이루는 다양한 특성들에 대한 부정(상처)과 이로 인한 혐오에의 학습(콤플렉스)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계기 삼아 자기 자신을 다시 고찰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혐오에서 인정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내가 나로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상처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아지는 사람은 상처에서 나아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