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에 빠졌던 시기가 있다. 작년 초부터 올해 중반까지 계속해서 허덕이며 살았다. 특히 내가 지쳤던 부분은 인간관계였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꺼려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관계를 지속해나가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그런 시기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지도해야만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내가 스스로 줄 수 있는, 그리고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총량을 달성하지 못했다.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하기, 무심코 지나치치 않고 알아봐주기, 원하는 것을 한번 더 물어봐주기, 흘려보내지 않고 기어이 걱정하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언어들을 충분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을 함께한 아이들인데 가장 중요한 마지막 시기에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함에 미안했고, 자주 발버둥치며 고민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울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변하는 건 없었다. 단지 내게 주어진 만큼의 에너지(그것이 최소한이라 할지라도)를 다 바쳐 사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지막 1년에 대한 미안함과,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도리어 홀가분함을 느끼며 올해 초 아이들을 졸업시켰다. 졸업식날 꽃다발을 드리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렸다며 얼마 전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아이가 있었다. 진로에 관한 고민을 나누던 끝에 유아교육과에 진학한 아이였는데, 대학교 수업 중 존경하는 인물을 발표하는 시간에 나를 발표했다고 하더라. 나처럼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듬어주고 싶다고. 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작년에 선생님이 너무 힘들어서 사실은 너희에게 주고 싶은 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해 아직도 미안해하고 있다고, 그래서 작년의 내가 여전히 부끄럽다고. 내 고백을 들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는 고등학교 3년 중에 선생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어쩜.. 내 평생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향기롭고 따스하게 내 마음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이 사랑은 표현해야 안다고 말한다. 사랑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랑의 총량이라는 말을 성립할 수가 있다면 표현(말과 행동)의 빈도와 강도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랑의 총량에는 진심의 무게가 포함된 게 아닐까?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싶어 애썼지만 보여줄 마음이 초라해 번민했던 그때의 나를 위로한 이 말은, 매 순간 처지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자 애썼던 진심을 알아봐 준 것이기에 내게 닿은 따뜻한 말이 되지 않았나. 해서 용기 없음을 탓하지 않고 에너지 부족에 굴하지 않고 내게 있는 사랑의 마음을 끈기 있게 지니고 있겠다. 뭉근히 끓고 끓어 그것이 향기와 온도를 내뿜게 되기를 소망하며 무거운 진심이 가닿기를 바라고 또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