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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Dec 14. 2021

저렇게 매력적인 여성을 안 좋아할 남자가 있을까.

첫사랑을 만난다면(31_소설)

“유현이 넌 피아노 연주해 본 적 있어?”

“초등학생 때 조금 배웠어. 근데 젓가락 행진곡 외에는 칠 줄 아는 곡이 없어.”



“그래도 한 곡은 칠 줄 아네? 다음에 같이 연주할래? 그거 듀엣곡이잖아.”

“그래, 그러자. 나 이제 수업 들어가 봐야겠어. 10분 뒤에 시작이네.”


“응. 슬슬 일어나자.”

토스트와 주스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려 일어났을 때, 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아!” 뒤를 돌아보니 혜지와 선우 오빠가 있었다.

“아…. 혜지야.” 이 만남이 당황스러웠다.     



“너 병원 다녀왔어? 같이 밥 먹자니까 왜 여기서 토스트를 먹고 있어.”

“아 그게…” 선우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신경 쓰여서 말을 잇기 어려웠다. 혜지는 그제야 유현이가 보인 듯 물었다.



“이분은?”

“아,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친구야.”



“안녕하세요. 약학과 안유현이라고 합니다.” 유현이는 혜지와 선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름이 동기 김혜지예요.”     




그때, 선우가 헛기침을 하며 혜지를 보며 이야기했다.

“혜지야, 나 먼저 가볼게. 교수님이 부르셔서 빨리 가봐야 하거든.”



선배, 여름이도 있는데 같이 가지 그래요.” 혜지의 말에 선우는 나와 유현이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인사를 했을 뿐, 걸음을 옮겼다. 혜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혜지씨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여름이 과대표 일 많이 도와주신다고요.”

“총무인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여름아, 맛있게 먹고 2시 수업 때 봐.” 혜지는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표정은 애써 짓는 표정이라는 것을.  


        

“아냐, 나도 가려고 했어. 같이 가자.” 혜지를 따라나섰다. 유현이에게 “나 먼저 갈게. 수업 잘 들어가.”라고 말했지만 유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눈망울이 오늘따라 더 깊어 보였다.          










“민지랑 은주는 어디 갔어?” 같이 밥 먹으러 갔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아 물어봤다.


“먼저 과방 올라갔어. 난 밥 먹고 잠시 문구점 들렸는데, 선우 선배가 있더라고. 근데 선우 선배랑 무슨 일 있어?”



“응. 사실 할 말이 있는데….”

“무슨 얘긴데 뜸을 들여. 어 저기 선우 선배다! 선우 선배!” 혜지가 우렁찬 목소리로 부르자 선우가 뒤를 돌아봤다. 선우는 우리를 보고 그냥 걷기 민망했는지 잠시 서서 기다렸다. 



가까운 거리라 우리는 혜지를 사이에 두고 함께 걸었다. 공강 시간이 길어서 싫다는 혜지의 투정에 선우와 나는 그저 영혼 없이 입만 웃을 뿐이었다. 나는 혜지를 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선우의 표정을 살폈다.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다 철학관에 도착했을 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들어와서 문을 잠근 뒤에야 “휴”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혜지 어깨너머로 보이는 힘든 표정의 그를 보니 괴로웠다. 학교에서 계속 마주칠 텐데. 둘 다 학년 대표라 부딪히는 일도 많을 텐데. 불편했다. 




한참 숨을 고른 후, 문을 열고 나오자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과방에서 혜지와 다른 동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기들이 모여있구나, 싶어 과방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멈췄다.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선우와 동기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아직 선우와 헤어진 걸 모르는 혜지가 선우 오빠에게 유현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지만,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들 모두 나와 가까운,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과방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조금 일찍 강의실에 들어왔다. 강의실에 앉아있자 혜지와 친구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온 걸 알았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가 민망해서 괜히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때 혜지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름아. 말하지 그랬어.” 무슨 말일까, 무슨 말을 한 걸까.



     

“선우 선배한테 헤어졌다는 말 들었어. 네 걱정 많이 하더라. 안 좋게 헤어진 거 아니니까 너 신경 많이 써주라고 부탁하더라고. 힘든 일 있는 거 같으니 옆에서 지켜달라고.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이들을 오해했다. 선우 오빠도 혜지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그들을 의심하다니.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색안경을 쓰고 본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힘들었을 텐데. 내 동기들을 불러서 나와 잘 지내라고 부탁하다니. 그는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 그의 배려심과 다정함을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그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지금 말하기 힘들겠지? 나중에 술 한잔 하자. 언니한테 다 털어놔. 도울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그래, 고마워.” 혜지의 다정한 말에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수업이 끝날 때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금요일에 개강총회 있는 거 알고 있죠? 자세한 건 과대표 통해 공지할 테니, 그때 봅시다.”



교수님께서 내게 손짓하셔서 따라갔다. 공지 사항을 점검한 뒤, 참석 인원을 조사하고 장소를 예약하라고 말씀하셨다.          






‘유현아, 난 이제 수업 끝났어. 넌?’


집으로 가는 길에 유현이에게 문자 했지만, 한 시간째 답이 없었다. 왜 답이 없지? 궁금했지만 첫날이라 동기들이랑 이야기하느라 바쁘겠지, 생각했다. 




동기와 선후배들에게 한 명 씩 전화를 돌리며 개강 총회 참석 여부를 물어봤다. 인원 조사라는 명목이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그들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같은 수업을 듣지 않아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자주 가던 술집을 예약하자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유현이가 아르바이트하러 갈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현이는 답이 없었다. 동기들과 어울려 논다고 내 문자를 보지 않았을 걸 생각하니 서운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유현이에게 답장이 왔는지 확인하려 핸드폰을 열었다. 수신 메시지 표시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으나, 그 내용을 읽고 나서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도. 좋은 하루 보내.’



이게 다야? 문자가 왔는지 수십 번을 확인했는데, 겨우 이런 답장이라니. 내가 우선순위가 아닌 그에게 섭섭함이 밀려왔다. 감정을 담아 답장을 길게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태형씨와의 연애를 통해 깨닫게 된 게 있다면,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문자를 보냈다.     



‘응. 오늘 병원 갈 거지? 나도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러나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먹는 내내 유현이는 답이 없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답장이 오겠지, 싶어 10시쯤 병원으로 나섰다. 유현이의 스쿠터를 타고 갈 때는 금방 갔는데, 혼자 걸어가려니 매번 걷던 이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한의원에 도착할 때까지 유현이는 답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점점 서운함은 사라지고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의원 윗 층에 산다고 했지만, 몇 호인지 몰라서 집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여름 학생, 오늘은 혼자 왔네요? 윗집 총각은 아까 다녀갔는데.”

“아, 유현이 왔었어요?”



“네. 아홉 시쯤? 다리 한 번 봅시다. 많이 좋아졌네요. 찜질받고 나면 내일은 안 와도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찜질을 받는 동안 머리가 복잡해졌다. 



왜? 갑자기 왜?


‘왜’라는 물음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설마 선우를 만나서 그런가? 하지만 유현이는 선우의 얼굴을 모르니 선우인 줄 몰랐을 텐데. 그럼 대체 왜일까. 한참 고민하다 유현이에게 문자를 다시 한번 남겼다.     



‘유현아, 나 병원 왔는데 너도 왔었다며. 무슨 일 있어?’     



점심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유현이에게서 답장이 왔다.

‘응. 오전에 병원 다녀왔어. 심리학개론 수업 듣느라 답장이 늦었네.’ 



수업 듣느라 답장을 못했다고 하지만, 왜인지 모를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구나. 나도 오늘 등록해야겠다. 점심 같이 먹을래?’

‘아니, 다른 약속이 있어. 수강신청 성공해서 같이 수업 들으면 좋겠다.’ 



두 개의 상반된 표현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같이 수업은 듣고 싶지만 밥은 먹고 싶지 않다라.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서 거절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현이의 문자를 받고 심리학과 사무실로 찾아가서 수강 신청을 했다. 20명 언저리의 소수 인원 수업만 듣다가 100명이 넘는 대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생각하니 설렜다. 과사무실을 나서는데 심리학과 1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까 약대 다닌다는 그 사람한테 번호 물어봤어?”

“번호는 못 물어봤어. 그래도 같이 모둠 과제하기로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꺄르륵 거리는 그녀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심리학과 수업을 듣는 약대생이 얼마나 될까. 설마 유현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유현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검은 긴 머리를 높게 묶은 그녀의 얼굴에선 빛이 나는 듯했다. 



저렇게 매력적인 여성을 안 좋아할 남자가 있을까.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유현이가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매주 월, 목 4시 30분에 업로드합니다 :)   - 오늘은 하루 지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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