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눈 Dec 30. 2021

그들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첫사랑을 만난다면(35_소설)

화요일 오전,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강의실 중간쯤, 유현이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멈칫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유현이에게 다가갔다.  



   

“여름아, 왔어? 내가 자리 잡아뒀어.” 유현이는 자리를 잡기 위해 올려둔 가방을 내리며 말했다.

“아, 응. 고마워.”



“오늘 전공 수업 끝나고 뭐해? 정문에 만화책 방 생겼던데 같이 갈래?”

“… 그러자. 재미있겠네.” 긴장했던 나와 달리,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나만 마음이 아픈 걸까.


          

그때, 가을 씨가 다가왔다.     

“유현 오빠! 오늘 수업 안 올 줄 알았더니 왔네요? 감기 걸려서 주말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면서요. 이제 괜찮은가 봐요?”


“아, 가을씨. 이제 괜찮아요.”

“그럼, 이제 저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요?” 유현이는 당황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오늘 여름이랑 같이 만화책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이러시는 거 조금 불편해요. 가을씨, 미안해요.”     


“괜찮아요. 근데 이제 반팔 입고 다니긴 춥지 않아요? 여름 지나고 가을이 오는 것 같은데.”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자신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주말 동안 가을 씨랑 연락을 했구나. 언제 번호를 교환 한 거지? 혹시 저 아이 때문에 내 고백을 듣지도 않으려 한 걸까. 근데 왜 만남을 거절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유현, 네 마음을 도저히 모르겠다. 너무 어려워.          




“유현아, 주말에 아팠어? 그날 비 맞아서 그런 거야?” 차마 번호를 교환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응. 비만 맞으면 감기에 걸리네. 여름인데 감기나 걸리고. 정작 여름이는 멀쩡한데 말이지.”

“이제 괜찮은가 보다? 농담도 하고.” 그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그날 일은 정말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처럼. 모든 걸 까맣게 잊은 것처럼.     







당황스러웠지만, 함께 수업을 듣고 모둠 과제하고, 오후에도 함께 밥을 먹으며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편하고 친하게 지냈다. 함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만화책방에서 몇 시간 내도록 만화책에 빠지기도 했다. 평일이면 그가 아르바이트를 마친 날, 함께 맥주를 먹는 날이 많았고 주말이면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다시 내 마음을 고백하려 했지만, 유현이는 내가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그에게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아모르파티.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우리 관계를 규정짓지 않은 채, 이 순간의 행복감을 만끽하기로. 


우리는 손을 잡는 등의 스킨십을 제외한,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함께 했다. 우리의 관계를 한 단어로 설명할 순 없었으나,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나 이 기쁨은 밤이 되면 사라졌다. 밤에 침대에 누울 때면,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이 관계가 사무치게 외로웠다.



괴롭다. 

그를 온전히 내 편이라 밝힐 수 없는 것이,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친구와 같은 척하는 것이, 내가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난 행복할까?     

이 정도면, 유현이와 이렇게 가까이서 웃고 떠들고 일상을 공유하는 정도라면, 평생 반복해도 괜찮은 삶일까.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없으니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를 보는 저 반짝이는 눈빛, 늘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대화들. 


이 모든 게 호감이 아니란 말인가. 너의 눈빛은 분명, 나를 좋다고 말하던 과거의 네 눈과 같은데, 왜 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친구로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인지. 난 네가 너무 어렵다.      






“여름아, 우리 내일 엠티 가잖아. 너네는 몇 시에 출발해?” 9월 셋째주 금요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유현이가 물었다.

“우린 11시쯤 만나서 가면 12시에 도착할 것 같아.”


“그렇구나. 애들이 철학과랑 같이 간다고 하니까 들떴어. 혹시 저녁에 같이 게임하고 놀래? 대신 우리가 사람 더 많으니까 술이랑 고기 많이 사갈게. 우린 운전하는 애들도 있어서 무거운 거 많이 들고 갈 수 있거든.”


“오, 그래? 우린 술 들고 가는 게 늘 일이었는데 잘됐다. 애들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아마 좋아할 거야. 네가 운전하는 거야?”


“아니, 난 잘 못해.”

“그렇구나. 운전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너무 편하겠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다음 날, 동기 8명과 모여서 마트에서 장을 본 후, 벽화마을에 도착했다.


보통 엠티는 바닷가나 계곡으로 많이 가는데, 왜 이번엔 산에 있는 벽화마을이냐면서 툴툴대던 동기들도 그곳의 예쁜 벽화와 한적한 풍경을 보자 말을 잇지 못했다.     


“우와! 여기서 내려다봐. 절경이다. 너무 멋진데?” 혜지가 말했다.

“그렇지? 짐 풀고 나서 우리 사진 찍으러 가자. 여기 예쁜 곳 엄청 많아.”     



우리는 벽화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앉아서 쉬고 있는데 동기 민주가 물총을 들고 나와서 우리에게 물을 쏘았다.     


“한 판 하셔야지?”

“이민주, 너 먼저 시작하는 게 어딨냐? 반칙이야. 우리 물총도 얼른 줘.” 혜지가 얼굴에 묻은 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정비할 시간을 딱 30초 주도록 하지. 30초 이후엔 바로 공격 개시야.” 민주 말에 우리는 물총을 들고서 허겁지겁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총 놀이는 엠티 갈 때마다 항상 하는 놀이었다. 


숙소는 꽤 넓은 마당이 있었고 날씨가 더웠기에 물총 놀이를 하기에 딱 좋았다. 혜지는 물총으로 만족할 수 없는지 바가지로 물을 떠나 붇더니, 수도꼭지에 호수를 연결해서 우리를 향해 물을 뿌렸다.     



“앗! 죄송해요. 아 어떻게 해….” 혜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호수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뭐야, 갑자기 왜?” 뒤를 돌아보니, 물에 젖은 유현이와 친구들이 보였다.     



“아…. 괜찮아요. 지난번에 한 번 뵀었죠? 안유현입니다. 저희가 술 좀 가지고 왔는데, 어디 두면 될까요?”

“정말 죄송해요. 술은 저한테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혜지는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연신 사과를 했다. 



“정말 괜찮아요. 대신, 짐 풀고 나면 그대로 갚아줄 거예요.” 유현이의 농담에 그제야 혜지는 안심이 된 듯 웃었다.          



“유현아, 너 여벌 옷은 들고 왔어? 에고 다른 분들도 많이 젖으셨네. 죄송해요.” 유현이의 가방에 묻은 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괜찮아요. 여름 씨죠? 전 유현이 룸메이트 이성민이에요. 오늘 노는데 저희도 끼워주셔서 감사해요.”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술도 가져다주셨는데 저희가 더 감사하죠. 오늘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요.” 그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난 생에 그의 장난 이후, 유현이와 헤어지게 되었으니. 물론 그의 탓을 할 생각은 없다. 내 잘못이었으니.     



짧게 통성명을 한 후 그들이 짐을 정리하러 간 사이, 민주가 내 팔을 찌르며 말했다.     

“여름아, 오늘 저분들이랑 같이 노는 거야? 잘생긴 사람 되게 많다. 으아아 고마워 정말!”



“야, 이민주! 너 남자 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냐.” 옆에서 혜지가 민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원래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몰랐니? 너 지금 남자 친구 있어서 잘 못 노니까 괜히 질투하는 거지? 김혜지 너도 그냥 놀아. 과팅도 제대로 못해봤잖아.”



“무슨 소리야.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니까.” 동기들은 신이 난 듯 까르르 웃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유현이와 친구들은 해먹과 커다란 평상 여러 개를 들고 나왔다.

“우와, 해먹도 들고 다니시나 보네. 사람 많으니 좋긴 좋다. 이런 것도 해보고.”

“그러게. 우린 늘 물총이 전부였는데 말이야. 내가 가서 도와줘야겠어.” 민주는 쪼르르 달려가서 유현이 친구들과 바로 어울렸다.      




우리는 커다란 평상에 둘러앉아 함께 삼겹살을 구우며 술잔을 돌렸다.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팅팅 탱탱 프라이팬 놀이, 더 게임 오브 데쓰, 손병호 게임 등등 술 게임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다. 한참 흥이 오르던 중, 성민씨가 말했다.    


 



“제가 약대에서 매운 거 제일 잘 먹는데 혹시 저랑 대결할 분 계십니까?”

“무슨 소리세요. 우리 혜지가 더 잘 먹어요!” 민주가 혜지 손을 대신 들고서 말했다. 혜지는 민주를 쏘아봤지만, 싫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럼 약학과 대 철학과로 붙읍시다! 이건 절대 질 수 없는 자존심 싸움이에요!” 성민씨의 말에 약학과 동기들이 박수를 쳤다. 우리도 질 수 없어 혜지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성사된 학과 대항전, 청양고추를 잔뜩 넣은 라면과 떡볶이를 먹는 그들의 얼굴을 빨갛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궁금한 마음에 한 젓가락 먹어봤다가 혀가 불타는 줄 알았다.     




밤이 무르익고,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캠프파이어를 하며 술을 마셨다. 모두 술기운이 잔뜩 올라와서 흥겨운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아재 개그를 보여주겠다며, 요즘 유행하는 말장난을 했더니 유현이 친구 중 한 명이 활짝 웃으며 “여름씨, 정말 귀여우시네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혹시 유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바라보았지만, 유현이는 무표정으로 “주정뱅이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안유현,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여름씨, 얘 술 더 마시면 진짜 웃겨요. 완전 주정뱅이가 따로 없다니까요.” 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친구들은 한 명씩 취해서 잠이 들었다.     





이번 화랑 다음 화는 호흡이 평소보다 2배 정도 길어요.

2021년 마지막 소설, 2022년 첫 소설이니까 좀 더 스페셜하게!!


A4 5장 분량이라 읽는 데 지겨움은 없었는 지, 모르겠네요.

올해 제 소설 많이 사랑 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및 직접 촬영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지 않아도, 견뎌야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